'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방법'을 먼저 읽고 오시기를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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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이글이 먼저냐, 도넛이 먼저냐
반짝, 홍중 발목 뒤의 타투가 점멸했다. 홍중이 느리게 눈을 떴다. 오늘 분의 에너지 충전 완료. 인간을 너무 흉내내어 만들어진 탓에 주어진 비효율적 충전 시스템. 푹 한숨을 내쉰 홍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일종의 부품 점검 목적이다. 책상 위의 단말기를 집어 든 홍중이 어제 제출했던 보고서를 확인했다. 오타 없고, 빼먹은 것 없고. 다시 어제자 보고서를 저장하고 돌아온 초기 화면엔 늘 똑같은 매크로 출력 문구 뿐이다.
단 하루를 365번째 루프 중.
한 평행우주에서 이렇게 여러 번 반복되는 루프는 홍중에게도 처음이었다.
이미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죄다 달달 외울 수 있는 수업을 듣는다. 교수님의 은근한 대학원 진학 유도를 에둘러 거절한다. 짧은 공강시간이나마 이용해 동아리 멤버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수백번의 루프 속에서, 강여상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도 김홍중의 몫이다. 밥을 먹고나선 교양을 들으러 간다. 질리도록 들은 동양철학 수업. 가장 뒷자리에 앉아 노트 위에서 필담으로 박성화와 함께 루프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도 이젠 하나의 일과다.
시간 좌표가 이상해
??
우리 계속 오늘 하루를 루프 중이야.
?? 나 전혀 몰랐어
당연하지, 다들 기억이 리셋되니까
몇번째 루프야?
못 해도 50번?
??????????
성화가 노트 반 바닥 가득 물음표를 채웠다.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은 것은 김홍중의 괜한 심술이다. 끝없이 물음표를 그리는 박성화의 펜을 홍중이 잡아 멈췄다.
여상이는?
그냥 평소랑 똑같아
근데 왜 자꾸 루프하지??
그걸 모르겠어
별 짓을 다 해봤다. 무언가 해결 못 한 고민이 있는 건 아닌건지, 밥 사주고 술 건네주며 은근히 물어봤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냥 강여상 배부르게 잘 먹여 집 돌려보낸 꼴이 됐다. 하루가 만족스럽지 않았나, 싶어 원하는 걸 다 해줘봤다. 형들 왜이렇게 저한테 잘해줘요? 종일 물어대고 행복한 미소로 집에 가더니만, 다음 날 일어났더니 루프는 여전히. 이거나 저거나 결과적으론 행복한 강여상 만들기 프로젝트. 행복이 답이 아니라면 불행일까. 기절을 시켜서 강재로 재워보는게 어때, 너무 답답해서 낸 의견은 실행 계획 짜기도 전에 그건 너무했다, 성화의 팔자 눈썹 만류에 진작 기각.
홍중이 기어이 노트 위로 펜을 마구잡이로 굴려댔다. 푹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였다. 답답해.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성화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닿는 왼쪽 뺨으로 해를 오래 올려다 본 사람처럼 열이 올랐다. 결국 홍중이 제 왼손을 들어 턱을 괴었다. 표정을 숨기고 싶어. 분명 뺨이 붉게 달아올랐을거야. 성화가 톡톡 노트 한 켠을 건드렸다. 제가 쓴 문장을 봐달라는 신호다.
자꾸 시간을 루프하면 어떻게 돼?
세계를 재구성할거야, 여상이가.
재구성?
펜을 쥔 홍중이 조금 망설였다.
모든걸 리셋하고, 온 우주를 새로 만들거야.
김홍중은 강여상의 재구성을 안다. 여러 번 겪었다. 이 우주의 신은 변덕쟁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온 우주를 다시 세운다. 온 우주가 재구성 되면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어떤 우주에서 강여상은 고등학생이었고, 어떤 우주에서 강여상은 좀비 사태의 생존자였고, 어떤 우주에서 강여상은 배우였으며 또 어떤 우주에서 강여상은 아이돌이었다. 김홍중은 내내 강여상의 주변을 쫓아다녔다. 감시하고 기록하고 보고하는 제 임무를 위하여.
그렇게 강여상이 만들어 낸 마흔 두 번째 평행우주에서, 단 하루를 365번째 루프 중.
이번 우주는 좋은 곳이었다. 좀비에 쫓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위장 신분을 얻기 쉽다는 것도,
박성화가 이 곳에 있다는 것도.
이 평행우주를 리셋시키는 건 나한테 너무 손해인데. 중얼거리며 홍중이 조금 시선을 옆으로 흘겨 성화를 바라보았다. 칠판을 바라보는 얼굴이 실은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다. 뭐든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테지. 다정하기도 해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도움을 요청할까?”
교양 끝나자마자 카페 가자, 홍중을 끌고 나온 성화의 첫마디가 그랬다. 요거트 한 잔 손에 쥔 홍중이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오늘은 정우영의 차례구나.
지난 루프들 속에서 홍중은 우영에게 숱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 우영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성화의 의견이었지. 만족할만한 결과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우영은 대개 안믿거나, 안믿거나, 안믿었다. 자기한테 사기치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건 양반이지. 다짜고짜 강여상한테 전화해서 너 신이냐? 묻는 통에 수습하느라 하루를 통으로 날린 적도 있었다. 벌써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홍중이 다 아는 미래를 위해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우영이?”
“진심이야?”
맞은 편에 앉아 딸기스무디 쪽쪽 빨아먹는 박성화는 그저 태연했다.
“내가 제안한거 다 해봤다며.”
“엉.”
“그럼 우리끼리는 안 되는거잖아. 누구 하나 더 있어야지.”
산이는 이미 맨날 폐쇄공간 정리하느라 바쁘고. 윤호는 강아지고. 종호 능력은 이런 데에 도움이 안되고. 민기는 요양 중이고. 성화가 손가락 꼽아가며 하나하나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홍중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걔는 안돼.
“우영이가 뭐가 어때서?”
“걔는 인간이잖아. 아무것도 몰라.”
“설명해주면 되지.”
“걔가 믿겠어?”
백퍼 안 믿어 걘. 홍중의 말에 그런가? 성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치만, 우영이는 특별하잖아.”
조곤조곤한 성화의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갈랐다.
“여상이가 선택한 인간이니까.”
그렇지, 걔는 강여상이 선택한 단 하나의 인간이지.
강여상이 만들어 낸 평행우주들의 공통점. 첫 번째.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있다.
두 번째. 다소 엉뚱한 것들이 있다. -이번 우주에서는 찌그러진 건포도처럼 생긴 성간천체, 오우무아무아가 관측되었다.-
세번째. 정우영이 있다. 어떤 우주에서도, 기어이 강여상의 곁에 정우영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강여상이 매번 정우영을 찾아내는 것에 가까웠다.
열 번 째 평행 우주까지 정우영이 나타났을 때, 홍중은 막연하게 정우영이 ‘선택 받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강여상이 정우영을 선택했다고. 초자연적 존재도 아니고, 강여상이 바라서 태어난 존재도 아닌 그저 인간 정우영을.
“그러니까, 우영이라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
한참 물끄러미, 컵의 표면에 맺힌 물기를 바지런히 닦아내는 성화를 바라보던 홍중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한 번 말해보자. 걔도 너도 어차피 내일이면 다 잊어버릴텐데.
매번 결국은 성화의 말을 따르게 되는 까닭을 홍중은 정확히 정의할 수 없다.
내일은 바뀔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가 약간.
그 애가 함께 고민해주는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게으름이 또 약간.
이미 시도해봤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말로 그 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또 약간.
우리가 함께 찾아낸 게 정답이었으면 좋겠는데, 또 동시에 정답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함께 있는 이 시간은 좋지만 나는 매일이 불안해. 제 마음을 저도 알 수가 없다.
0. 베이글의 구멍은 한 개일까 두 개일까
정우영은 그야말로 아침부터 지랄맞았다. 형 어제 나랑 술마셨잖아악! 한껏 억울해하는 꼴을 보는 홍중은 어이가 없었다. 그게 언제적 일인데. 기시감 운운하는 꼴을 보아하니 기억이 엉킨 모양이었다. 이상하네, 정우영이 그걸 기억할 리가 없을텐데. 하지만 루프 중에 마지막으로 우영과 술을 마셨던 건 꽤나 오래전이다. 진짜로 정우영이 선택 받은 인간이라 뭔가를 기억하고 있는걸까? 홍중은 잡채밥을 앞에 두고 꽤 길게 고뇌했다. 어쩌면 성화의 선택이 옳았을 지도 몰라. 곰곰히 생각하던 홍중이 결국 성화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우리는 루프중이고, 어제 네가 우영이한테 우리의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청하자는 제안을 했었다고. 뚫어져라 쳐다봐 겨우 눈 마주치고, 핸드폰 화면을 톡톡 쳐 신호를 보냈다. 메세지를 확인한 성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인이라는 걸 증명해보라니까?”
물론, 우영의 반응은 홍중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우영이 잔뜩 왁왁거렸다. 밖에 비가 쏟아져서 산책을 못 나가게 된 치와와 같았다. 거봐, 내가 이럴거라고 했지. 정우영 뜯어말리느라 진땀 흘리는 박성화 옆에서 홍중은 우아하게 맥주를 마셨다. 형들은 이런 장난이나 치려고 나를 불러낸거야?! 숙취로 개고생하고 있는 동생을?! 때맞춰 우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집으려는 우영의 손을 성화가 만류했다. 제발 진정하고 진지하게 좀 들어봐, 우영아. 성화가 제발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홍중을 바라보았다. 때맞춰 우영이 홍중에게 화살을 돌렸다.
“뭐, 형도 외계인이라고 해보시지?”
“나는 외계인은 아니고…….”
몇 번이고 겪은 일인데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외계인이 만든 안드로이드야.”
모델명 S-117. 홍중의 자기소개에 악! 우영이 자리에서 튀어오르며 소리를 질렀다. 진짜 장난하냐?, 물으며.
“이렇게 될거랬잖아.”
[그래두….]
우영이가 이렇게까지 안 믿어줄 줄은 몰랐어. 전화 너머로 대꾸하는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이미 충분히 주눅 들었는데, 나까지 더 핀잔 주기도 뭐하고.
“그래도 어느 정도는 믿는 것 같던데.”
[그런가. 그래야할텐데.]
고뇌하는 음성이 진지했다. 모든 걸 기억하는 홍중보다도, 성화가 더 루프를 걱정중인 것 같았다.
[오늘도 다시 아침으로 돌아가겠지?]
“응, 그럴 것 같아.”
[나는 또 다 까먹겠네.]
“응, 전부 까먹을걸.”
[우영이도 까먹을까?]
“그렇겠지.”
[우영이한테 또 말할까? 나는 미래인이고, 너는 안드로이드라고.]
“말 하고 싶어?”
[응. 걔가 우리 말을 믿어줄 때까진.]
“그래, 해보자.”
가볍게 답 한 홍중이 엔터키를 눌렀다. 오늘자 보고서 저장. 데이터 전송 중. 업로드 완료. 까맣게 점멸하는 창을 보고 있으려니, 전화기 너머의 성화가 한참 말이 없었다. 무언가 고민하고 있나. 침묵을 기다려주던 홍중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 해?
[만약 내가 모든 걸 기억하고, 네가 모든 걸 잊는다면 나는 뭘 할까, 하는 생각.]
“…뭐 할 것 같은데?”
[…니 욕?]
장난이야. 하는 말 뒤로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래, 어디 한 번 실컷 해봐라. 판 깔아줄게. 기지개를 켜며 홍중이 대꾸했지만 성화는 그냥 아냐아냐, 농담이라니까. 웃을 뿐이었다.
[너는 나한테 할 얘기 없어?]
“뭐, 욕이라던가?”
[그래, 어디 해봐.]
허락해주지. 성화의 웃음이 다시 전화를 타고 넘어왔다. 힐끔 시계를 바라 본 홍중이 눈을 깜빡였다. 오전 4시 59분 30초. 31초. 32초. 33초.
“진짜 한다?”
[응.]
홍중이 심호흡했다. 뭐야, 진짜 욕할거야? 왜 뜸을 들여! 성화가 아우성이었다. 애써 무시한 채, 홍중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52초, 53초, 54초.
“좋아해.”
[어?]
그리고 뚝.
홍중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느새 통화가 끊긴 핸드폰 화면에 수요일 세 글자가 선명히 떠 있었다. 그제야 홍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무 번 째 평행우주에서 김홍중은 깨달았다.
이 세계에선 신도 짝사랑을 한다.
신이 보답 받을 생각조차 없는 맘을 품은 채 이따금 눈물 흘리며 어른이 되는 동안, 그 마음이 짝사랑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렇게 세계가 강여상의 법칙 하에 굴러갔다.
이런 세상이니, 한낱 미물에 불과한 안드로이드 S-117의 짝사랑이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오늘도 홍중은, 성화가 잊어버리고 말 고백에 성공했다.
00. 토성의 고리는 블루베리맛 베이글
반짝, 홍중 발목 뒤의 타투가 점멸했다. 홍중이 느리게 눈을 떴다.
366번째 루프.
드디어 꼬박 1년을 넘겼다.
부품 점검 겸, 스트레칭을 한다. 어제 올린 보고서를 검토한다. 혹시 몰라 인간에게 정체를 밝혔다는 문구는 또 뺐다. 혹시 모르지, 홍중이 모르는 사이에 안드로이드 근무 규칙 110101000번이 바뀌었을지도. 초기화면에서 또 똑같은 매크로 출력 문구를 마주한다. 에,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죠?로 시작되는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다. 오늘은 그냥, 예 대학원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대꾸해봤다. 교수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진작 이렇게 해줄 걸 그랬나. 기분이라도 좋으시라고. 그래도 대학원은 가고 싶지 않다. 동아리 멤버들과 밥을 먹는다. 마주친 박성화도, 정우영도 어제 일을 전부 잊어버린 눈치다.
얘네 진짜 다 까먹었네.
한 두번 겪었던 일이 아닌데도, 새삼 외롭다.
아니지, 항상 있었던 일이잖아. 뭘 또 새삼스레. 애써 저를 다독인 홍중이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겨 볶음밥 앞에 앉았다. 아, 지겨운 중식. 맞은 편에서 단무지 랩을 뜯던 산이 홍중을 힐끔거렸다.
“형, 피곤해보이네?”
“엉, 나 오늘 풀강.”
“…이상하네, 나 오늘 왜이렇게 기시감이 들지?”
저 기시감 저거, 사실 저거 선택 받은 인간이랑 아무 관련 없는 걸지도 몰라. 속으로 쯧쯧 혀 찬 홍중이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그래도 성화가 하겠다니까 말은 해줘야지. 둘 다 아무것도 기억 못한대도 약속은 지키고 싶었다. 우리는 루프중이고, 네가 우영이한테 우리의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청하자는 제안을 했었고, 그래서 어제 말했다가 대판 까였다고. 근데 어제의 너는, 오늘 또 도움을 청하고 싶어했다고. 홍중이 제 무릎으로 성화의 무릎을 툭툭 쳤다. 돌아 본 성화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자연스레 제 핸드폰을 집어 든 성화가 답장을 보냈다. 알았엉. 그리고는 무슨 하얗고 동그란 토끼 이모티콘 하나.
“우영아, 이야기 좀 하고 가.”
성화의 말에 우영이 어정쩡한 자세로 나? 되물었다. 여기 우영이가 너 말고 또 있냐? 홍중이 괜히 우영을 타박했다. 어엉, 건성으로 고개 끄덕거린 정우영이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갸웃거리긴 뭘 갸웃거려. 괜히 홍중이 시비 걸기 위해 시동을 걸던 그 때,
“아, 잠깐만. 나 형이 무슨 이야기 하려는지 알 것 같아.”
“어?”
“형, 미래인??”
냅다 성화를 향해 삿대질하는 우영의 손을 홍중이 급하게 잡아내렸다. 그야말로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말도 안돼, 진짜 기억한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홍중은 우영의 귀에 급하게 속삭였다. 제발조용히좀해.
우영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니.
이것도 변화는 변화지. 홍중이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려 보고서를 작성했다. 성에 찰 만큼의 성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드디어 재구성을 막을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재구성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 지는 모를 노릇이라 여전히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하루하루 지나갈 수록 마음은 더 초조해져만 간다. 남은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도 한몫을 했다.
그럼 형이 판단하기에 진짜로 도움이 필요하면, 그 땐 알려줘.
우영의 말을 떠올리며 홍중은 제 의자를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글쎄. 성화라면 몰라도, 우영이한테는 모든 걸 말해줄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은데. 안드로이드의 근무 규칙은 까다롭다. 우영에게 이 세계의 비밀과 신의 존재를 알린 것 만으로도 이미 징계감일지도 몰랐다. 징계가 내려진다면… 그냥 받지, 뭐.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몰라. 망설이던 홍중의 손이 기어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신호음이 네 번을 넘어가기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밤에 잠겨 보다 차분해지고, 꺼끌해진 목소리.
[여보세요.]
“자?”
[아니, 괜찮아. 왜?]
전화 너머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자다 깬 모양이었다. 잘 자고 있던 애를 깨웠다는 약간의 죄책감. 그리고 자는 와중에도 내 전화를 받아주어 고맙다는 약간의 기쁨. 목소리를 듣고 싶었단 말은 차마 못하겠고,
“그냥. 뭐 변한 게 없나, 하고.”
홍중은 괜히 퇴근 후에도 일 얘기를 꺼내는 고리타분한 상사처럼 군다.
[…없는 것 같은데.]
성화의 목소리가 영 싱겁다. 역시 그렇지? 멋쩍어진 홍중이 하하, 웃었다. 길어진 정적 사이로 새벽의 침묵이 고인다. 성화가 몇 번인가, 입을 떼려다 마는 것이 느껴졌다. 할 말 있어? 기어이 홍중이 먼저 물었다.
[아니, 그냥….]
“싱겁게.”
[혼자서 365일을 루프하느라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미 내가 여러 번 말했을까봐.]
실은 처음이었다. 성화의 앞에서 반복된 루프의 날짜를 곧이곧대로 말하는 건.
“그냥 말하면 되지, 뭐 그런거까지 생각해.”
[그래도.]
“그냥 말해줘.”
홍중이 가볍게 재촉했다. 책상 위에 팔 대고 얼굴을 반쯤 괸 홍중이 괜히 제 의자를 좌우로 빙글빙글 돌려댔다.
[혼자 힘들었겠다, 수고했어.]
홍중의 의자가 멎었다. 홍중이 제 팔 안쪽에 얼굴을 묻었다. 나쁘지 않네, 이거.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랐다. 진작 말할 걸 그랬나. 그렇지만, 그래도.
“…별 것도 아닌데 뭘.”
“음, 그리고 있잖아….”
성화의 말을 기다리며, 홍중이 제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손 끝에 귓볼의 온기가 녹아든다.
“우리 지난 365일 동안 뭐 했어? 또 물어보는거라면 미안해.”
‘우리’….
우리의 지난 365일. 홍중은 기록을 되짚었다.
교수님한테 대학원 제의를 받은 횟수가 322회. 점심이 중식이었던 횟수가 총 352회. 박성화에게 도움을 청한 횟수가 213회. 정우영한테 우리의 정체를 알린 횟수가 83회.
“글쎄, 재미있는 건 없었는데.”
“진짜?”
막, 수업 째서 같이 놀이동산 가거나. 바다 보러가거나. 그런 적도 없어? 정말로? 묻는 목소리가 한가득 기대를 담고 있었다. …없는데. 덩달아 홍중의 대답도 주눅이 들었다. 그랬어야했던건가. 후회가 성글다.
“아쉽다. 공짜로 생긴 일 년인데.”
“아니, 공짜로 생긴 건 아니지….”
홍중이 어물어물 변명한다. 나는 빨리 이 사태를 끝내야 할 의무가 있어. 이런 걸 바로잡으라고 파견 되기도 했고. 시간 좌표가 고정되지 않는 건 큰일이니까….
“그래두, 일 년이나 되는데 그 중 하루는 괜찮잖아. 따지자면 365일 동안 연장근무를 하고 있는건데.”
아니다. 너는 매일매일 일하는 거니까 년 단위겠다. 하루 정도 땡땡이야 뭐, 걔네도 봐주겠지. 전화 너머로, 주욱 기지개를 켜는 성화의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한 번 생각해봐. 땡땡이 치는 거.”
“안돼.”
“그리고 땡땡이 칠 때 나도 데려가줘.”
오늘 수업 재미 없어. 가볍게 덧붙인 성화가 작게 하품했다. 성화는 졸린가. 하긴, 자는 애를 깨운거였지. 시계를 확인 한 홍중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30초, 31초, 32초, 33초….
“생각만 해볼게.”
“긍정적인 검토도 부탁합니다.”
“응, 검토만.”
43초, 44초, 45초.
“그니까 이만 자자.”
“너는?”
“나도 자야지.”
“그래, 이만 자자. 잘 자, 홍중아.”
55초, 56초, 57초…. 홍중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초침을 노려보았다.
“성화야.”
“응.”
“……잘 자.”
눈 한 번 깜빡하면, 어김없이 또 수요일 아침.
동정 받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는 외로워, 성화야.
고백 대신 그런 말을 꺼내놓고 싶은 밤들이 있었다.
01. 보아뱀을 삼킨 베이글
“그냥 오늘은 땡땡이 치고 놀러가면 안돼?”
제의는 홍중도 성화도 아닌, 우영에게서 먼저 나왔다.
“안돼.”
“왜? 하루 쯤은 괜찮잖아. 계속 반복되고 있는데.”
성화가 우영의 말을 거들었다. 꽤나 혹한 모양이었다.
“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빨리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 방법이라는 거, 있긴 한거야?”
우영의 말에 홍중이 입을 꾹 닫았다. 실은 저도 모른다. 진짜 방법이 있을지, 있다면 찾아낼 수 있을지.
지금이 루프의 초반이었다면 모르는 척 하루 정도는 시간을 냈을거다. 바닷가로 당일치기도 좋겠다. 기차 타고 어딘지 모르는 역에서 내리는 것도 재미있겠지. 하루가 다시 되돌아가자마자 박성화를 전화로 깨운다면, 저 멀리 남도까지도 내려가볼 수 있을테고. 하지만 초반엔 루프가 금방 끝날 줄 알았고, 이제 와서 시간을 내기엔 너무 늦었다. 강여상이 언제 세계를 재구성하기로 맘 먹을 지 모르는걸.
“가만 보면 형도 참 융통성 없어. 바로 잡는게 아무리 의무라 해도 그렇지.”
뭔가 말하려던 홍중이 입을 닫았다. 괜히 혼자 찔렸다.
홍중의 의무는 감시하고 기록하고 보고하는 것 까지다. 시간좌표가 뒤틀리든 말든, 루프가 계속 되든 말든, 재구성이 몇 번 일어나든 그것은 홍중의 일과 상관이 없다. 그냥 일어나는 일을 관찰해서 보고하면 되는 것 뿐이니까. …그래도.
“홍중이 말도 맞긴 해. 바로 잡긴 해야지.”
박성화가 이 평행우주에 있는걸.
이 평행우주에서라면, 의무를 넘어, 제 관할이 아닌 것마저 관여하게 되는 것이 안드로이드 근무규칙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해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프가 반복되며, 성화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더더욱. 심지어는 그 시간들을 저 혼자서만 기억할 수 있다고 해도.
“…성화야, 너네쪽은 루프가 몇 번이나 계속될거라고 생각해?”
“알 수 없대.”
“역시 그렇구나.”
“너희는?”
“…똑같지, 뭐.”
아, 진짜. 예측 불가능한 신이라니까. 그럼 뭔가 변화가 나타나기 전까진 꼼짝없이 기다려야겠네. 홍중이 중얼거렸다.
우영이 모든 걸 기억한 이후로, 다시 또 세 달.
재구성까진 얼마나 남았을까. 한참 동아리방 의자에 앉아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홍중이 마른세수를 했다. 요 며칠 내내 남는 시간엔 하루 종일 기록들을 살펴봤다. 생각이 복잡했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죄 제자리였다. 이젠 우영에게 말을 한 것이 잘 한 선택이었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벅벅 눈가를 문질러 댄 홍중이 눈썹뼈를 꾹꾹 눌러댔다. 숫자를 알 수 없는 카운트다운. 수백 번의 루프.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문제. 지겨운 보고서. 여전히 묵묵부답인 모니터. 지겨운 중식. 혼자만의 기억. 외로운 집구석. 사랑이가 있을 땐 좋았는데. 하지만 이젠 걔도 윤호로서의 자기 삶이 있으니까.
“홍중아.”
“어?”
“무슨 일 있어?”
박성화의 다정함은 예민에서 나온다. 주변의 모든 것에 그 애의 시선이 닿는다. 예민한 기척으로 모든 것을 보고 듣는다. 그런 박성화가, 김홍중의 기분을 눈치 채지 못 할 리 없다.
“아니, 괜찮아. 눈이 좀 뻑뻑해서.”
홍중이 가만히 앉아 감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꼴을 빤히 바라보던 성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재구성은 무서운거야?”
“그렇진 않아. …그냥, 잠들었다가 눈 뜨는 것 같애.”
“다행이네.”
결코 다행인 일은 아닌데. 홍중만 속으로 쓰게 말을 삼킨다. 나야 눈 감았다 뜨면 재구성이지. 재구성 내내, 강여상의 폐쇄공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 그냥 재구성 되도록 놔두면 안되는거야?”
“안돼.”
번개라도 맞은 듯 펄쩍 뛰며 홍중이 부정한다. 왜? 성화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고통도 없고 무서운 것도 아니라며. 왜 안돼?”
그건…….
홍중은 차마 말 할 수 없다. 나는 네가 없는 많은 우주를 거쳤노라고.
강여상의 변덕으로 사라진 수많은 평행 우주들 사이, 그 속의 박성화.
처음 둘이 만난 것은 강여상이 만들어 낸 다섯 번째 평행우주였다. 홍중과 성화는 강여상네 학교의 교생선생님들. 적당히 필요한 만큼만 대했다. 박성화는 쉽게 서운해했지만, 홍중에겐 그 아무런 감흥도 되지 못했다. 어차피 평행우주가 재구성 되면 사라질 존재. 수많은 존재들 중 하나. 아니나다를까, 다섯 번째 평행우주는 머지않아 사라졌다. 박성화도 함께.
박성화가 다시 나타난 것은 스물두 번째 평행우주에서의 일이였다.
좀비 사태가 발발한지 삼 일. 정우영을 데리고 겨우 도착한 베이스캠프에 박성화가 있었다. 이미 정우영이 ‘선택된’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박성화는 옆구리에 강여상을 낀 채였다. 애들끼리는 원래부터 친한 사이였다지만, 우리는 지금 이 애들의 보호자잖아. 우리도 친구 해도 되지 않을까? 성화가 건넨 수줍은 인사를 홍중은 일견 매정하게 거절했다. 좀비 아포칼립스의 평행우주라니, 채 한 달도 가지 못해 재구성 될 게 분명했다. 또 사라지고 말테지. 사라지고 말 것들에게 맘 주기가 무서운 때였다.
한 달은 무슨, 스물두 번째 평행우주는 단 2주 만에 재구성 되었다. 박성화가 좀비에 물려서.
우영이랑 여상이를 부탁해, 겨우 그 한 마디를 몇 번이고 픽픽 쉰 소리로 당부하다 눈의 빛이 꺼져갔다. 떨리는 손 부여잡고 뒤를 돌았다. 소리도 없이 눈물 흘리던 강여상이 이내 오열을 했다. 근처의 좀비들이 다 몰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우영이 강여상을 품에 껴안았다. 정우영도 강여상만큼 울고 있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박성화의 눈을 감겨줄 새도 없이, 김홍중은 무기를 들고 뒤돌았다. 이 세계의 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재구성.
눈 감았다 뜬 세계에는 박성화가 없었다. 자그마치, 서른세 번째 우주까지. 열한 개의 박성화가 없는 평행우주를 거치고 나서야 서른세 번째 평행우주에서 다시 만난 얼굴. 울컥 눈물이 치받을 뻔 한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드라마 막내 조연출과 막내 작가로 만난 자리였다.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도 떨림이 묻어 나온 인사에 박성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물두 번째 평행우주에서 친구로 한 번 불러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
둘은 좋은 친구가 됐다. 강여상이 세계를 재구성하기 전까지는.
마흔두 번째 우주라니. 참나.
새삼 모든 우주를 되짚어 본 홍중이 길게 의자에 기대었다. 절로 긴 한숨이 나왔다.
아, 나 지쳤나.
안드로이드 S-117모델은 감정을 안다.
그건 영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보고서들을 눈이 빠져라 검토하는 일을 그만 두고, 홍중은 일찍이 침대에 누웠다. 오늘만큼은 박성화에게 전화도 걸지 않을 셈이었다. 좀 지쳤나봐. 잠깐 쉬고 다시 일하면 되겠지. 성화 말대로, 공짜로 얻은 일 년하고도 반인데 하루쯤은. 그런 생각이 무색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자세를 바꿔가며 뒤척거리던 홍중이 기어이 다시 아까의 생각을 떠올렸다. 마흔두 개의 평행우주와 박성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가장 처음 봤을 때 부터 좀 잘 해줄걸. 김쌤, 하고 저를 부르던 박성화의 얼굴을 기록 속에서 불러 온 김홍중이 그제야 조금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다섯 번째 평행우주가 좀 더 길었더라면 우리도 친구가 됐으려나. 그 평행우주의 재구성만 아니었다면… 잠깐. 어쩌다 재구성 되었더라?
자리에서 일어난 홍중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었는지, 머릿 속의 기록을 열람하는 데에도 한참이다. 결국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섯 번째 평행우주의 기록을 찾아낸다. 목적은 재구성의 바로 직전부터 그 전 날의 기록.
아. 정우영 여자친구 생긴 날. 이거였구나, 씨발.
홍중이 핸드폰을 집어들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최 산.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여보세요?”
[형, 폐쇄공간이 열렸는데요.]
“응.”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제야 실마리를 잡았는데, 강여상은 벌써 세계를 재구성중이었다.
오류번호 101010. 빨려들어갔네 모두 베이글 속으로
[할 수 있다면, 멈춰줘.]
겨우 마지막 메세지를 전송해놓고 홍중은 푹 고개를 파묻었다. 이제 어쩌지. 폐쇄공간으로 들어가려던 시도는 모두 좌절되었다. 그 누구도, 그 근처에 접근 조차 하질 못했다. 가까워진 발소리.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얼굴이 발갛게 상기 된 성화가 서 있다. 무릎을 두 손으로 짚고 숨을 고르는 채였다.
“무슨 일이야?”
“성화야.”
곧 세계가 재구성 될 것 같아. 떨리는 목소리로 홍중이 덧붙였다. 둘의 눈이 오래 마주쳤다. 그 누구도,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더이상 없어. 말하는 김홍중의 목소리가 침울했다.
“홍중아, 너 울어?”
묻는 말씨가 조심스럽다. 박성화의 온 오감이 다정을 위해 열려있다.
“안 울어.”
마흔두 번의 평행우주를 통틀어 재구성을 멈출 수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정말 이 평행우주의 모든 것이 사라질까. 다음 평행우주에도 박성화는 존재할까. 우리는 또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일걸. 보고서 한 글자라도 더 빨리 들여다볼걸…. 이제서야 모든 날들이 후회가 된다.
“울지마. 괜찮을거야.”
“…넌 또 다 까먹을거잖아.”
“또 네가 친구 해주면 되지.”
그런게 아냐. 나는 그런게 아닌데.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강여상은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니까, 바로 다음 번의 평행우주에 네가 없더라도 나는 몇 번의 평행우주를 거쳐 결국은 너를 만나게 되겠지.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만나든 넌 매번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했으니까 문제는 없어. 그렇다지만.
“성화야, 나는 외로운 게 무서워…….”
제 별에서 버려진 안드로이드도 짝사랑을 한다.
안드로이드 S-117은 강여상의 지구에 유배되었다.
인간과 인간의 감정이 궁금했던 외계인들이 S-117을 인간에 가깝게 구현해냈을 때, 그들이 기대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감정이라는 건 지나치게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 하지 않을 선택을 하게 하고,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게 했다. 비약적이고 과민했다.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지나치게 슬퍼했다. 감정은 쓸모 없었다.
감정을 가진 안드로이드 S-117 또한 그들의 우주에선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S-117을 폐기처분 하는 대신, 수억개의 평행우주를 통틀어 가장 한적한 곳에 파견 보냈다. 자기들에게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곳. 주기적인 감시가 필요하지 않은 곳. 이 곳은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강여상이 만든 평행우주의 지구.
누구도 읽어주지 않는 보고서.
누구도 점검해주지 않는 본체의 부품.
누구도 업데이트해주지 않는 자신의 펌웨어.
버려진 별에서, 답장 없는 제 별을 향해 신호를 쏘아 올리는 일.
오로지 신의 뜻을 따라 창조 된 피조물은 아니었으나, 인간을 지나치게 흉내내어 만들어진 탓에 가지게 된 감정이 신을 닮아갔다. 그래서 안드로이드는 제 우주의 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의 신은 사랑을 한다.
김홍중은 그 감정을 안다. 뼈를 에는 추위와 다를 바 없는 외로움도. 먼저 친구가 되고 싶다며 다가와준 박성화의 다정함도. 혼자였던 수백날을 헤어 처음 갖게 된 친구라는 존재를.
“나는 네가 다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평행우주가 너무 길었다. 쌓은 감정과 기억이 너무 많다. 내가 인간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인간의 망각은 축복이다. 감정을 가진 존재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은 어쩌면 저주와도 같다.
그러나 신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다만 홍중은 맞게 된 모든 재구성의 순간마다 기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들의 신, 강여상에게. 이번 평행우주에도 박성화가 있게 해주세요. 서른세 번째 평행우주부터 지금의 마흔두 번째 평행우주까지, 온 우주에 박성화가 있었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지만. 박성화를 만나게 된 것도, 사랑하게 된 것도 모두 강여상의 덕분이니 원망할 수 있을 리 없다. 실은 우영의 말이 맞다. 마흔두 번째 평행우주까지 강여상을 관찰해 온 김홍중은 알 수 있다. 그 애가 얼마나 선한 애인지. 그 순진하고 선한 얼굴을 어떻게.
그래도 이건 너무해. 나는 어쩌란말이야. 신은 모든 걸 잊어버리지만 나는 모든 걸 기억하는데.
“나는, 너도 이 밤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마. 우리가 다른 평행우주에서 다른 모습으로 만난다고 해도, 모든 걸 기억해줘.
아니, 아냐. 하나만 기억해줘. 너와 내가 친구라는 것만이라도.
“어쩌지. 약속은 못 하겠다.”
다정한 손길이 홍중의 어깨를 감싸쥔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약속해줄 수 있어.”
홍중은 차마 성화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미안해 하고 있으면 어쩌지.
“여상이가 이 온 평행우주를 뒤집어 엎는다고 해도.”
꾹 감은 홍중의 두 눈덩이에 열이 오른다.
“나는 너랑 친구가 되고 싶을거야. 분명.”
맞아, 너는 항상 그랬지. 홍중이 기어이 눈물을 보인다. 온통 서럽다. 성화도 더이상 울지 말란 소리를 꺼내질 못했다. 안돼.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라면 이대로 끝낼 순 없어. 홍중이 두 손을 꽉 주먹 쥔다. 시간이 돌아가기 오 초 전에야 고백할 수 있었던 비겁한 용기를 모두 끌어모은다.
“좋아해. 너는 기억도 못 할 평행우주에서부터 그랬어.”
울음 잔뜩 섞인, 눈 한번 못 마주친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동그랗게 뜬 성화의 큰 두 눈이 반짝거렸다. 아아, 이제야 홍중이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다. 그랬구나. 작게 중얼거린 성화가 무릎을 숙여 홍중과 눈을 맞춘다. 다정이 가득하다.
“그럼 다음엔, 더 일찍 나 친구로 받아줘.”
응. 그럴게. 홍중이 고개 끄덕인다.
박성화도 외로움을 안다. 그건 먼 미래에서 온 것이다. 성화의 모든 어린 시절은 미래에 있다. 아득히 멀리 있어 손 닿지 않는다. 외로움을 무서워한 적은 없으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입맞춤이, 다음 평행우주에서 날 만날 너에게 조금 더 확신을 줄 수 있다면.
“꼭이야. 다음엔 더 일찍. 그러니까, 이건 선물이야.”
둘의 입술이 가볍게 맞붙었다. 헉, 놀라 뒤로 떨어지려는 홍중의 어깨를 성화가 붙잡았다. 부드럽게 두 입술이 떨어졌을 때, 화들짝 놀란 홍중이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성화가 웃고 있었다. 홍중은 다시 또, 울고만 싶었다.
방금 전 입맞춤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하나도 꺼내지 않은 채로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앉아 이야기를 했다. 대개 홍중은 지난 평행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성화는 간간히 웃거나, 질문을 했다. 가장 황당했던 평행우주, 가장 빨리 재구성 된 평행우주, 가장 바빴던 평행우주. 여러 질문에 홍중은 거침없이 답해주었으나 날 좋아한 건 몇 번째 우주부터였어?, 하는 질문에만은 절대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몇 번째 우주부터였는지와 스물두 번째 평행우주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성화에게 들려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밤을 새도 좋을텐데. 하루 정도는 빼먹고 함께 바닷가를 갈 걸. 거기서 조금만 더 용기내서 빨리 이야기 해볼걸. 사실은 너를 좋아한다고.
아주 커다란 달이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김홍중 혼자만이 기억할 이별의 순간이 온다.
101.베이글은 하나의 세계다.010
홍중은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그냥 잠에서 깼다. 눈은 뜨지 않았다.
눈을 떠서 마주할 현실이 두려웠다. 이 곳이 몇 년도일지, 강여상은 어떤 새로운 평행우주를 만들어냈을지. 그런 것이 하나도 궁금하지가 않았다. 그저 무력했다. 사실상 폐기처분을 대신해서 보내 진 임무도 취소해달라고 할 수 있나. 이 평행우주에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자신 뿐이라는 게 끝없이 암울했다. 전화가 울리기 전 까지는.
발신인 박성화.
겨우 실눈 떠 확인한 방 안이 눈에 익었다. 그제야 숨이 마음대로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나 잘해찌, 얼른 칭찬해조. 빨리.”
치근치근, 우영이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피식 웃음 샌 홍중이 손을 들어 몇 번이고 정우영의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멀찍이서 성화가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 홍중이 바짝 긴장했다.
함께 밥 먹는 내내 홍중은 말 수가 없었다. 실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기분 좋은 정우영만 내내 말이 많았다. 우영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빈 오디오를 우영이 열심히 채우는 동안, 홍중은 여러 번 성화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밥을 입으로 먹는건지 코로 먹는건지, 영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있잖아, 우영이는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거야?”
빨리 네가 답 해. 홍중이 우영을 바라보았지만 우영은 입을 꾹 닫은 채였다. 영 대답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쉽게 눈치 챈 홍중이 그제야 제 입을 열었다.
“글쎄, 나는 너무 잘 알 것 같은데.”
들키고 싶지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그거 내가 제일 잘 알지.
뭔데? 성화가 재차 물었지만 홍중은 입을 열지 않았다. 죽어도 부끄러워서 말 못하겠어. 다시 홧홧하게 귓바퀴에 열이 올랐다. 말을 어떻게 돌리지, 고민하던 홍중의 시선 귀퉁이에 술잔이 걸렸다.
“어쨌든, 여상이 덕분에 이 지구는 조금의 질량비도 어긋나지 않은 상태로, 아주 조화롭게 움직이고 있어. 오늘도.”
모두의 맥주잔이 짠, 맞붙었다 떨어지는 내내 홍중은 곁눈질로 성화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간밤의 입맞춤을 의식한 탓이다. 그러다 두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홍중이 허둥지둥 하는 사이, 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들끼리 먹어, 나 급한 일 있어서 간다!”
“야, 어디가?!”
홍중의 다급한 부름에도 정우영은 한 번 뒤돌아보지 않았다. 야속한 자식. 나랑 박성화만 여기 남겨놓으면 어떡하라고. 멀어지는 정우영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김홍중을, 박성화가 소리내어 불렀다.
“홍중아.”
“어, 어어.”
“이거 탄다, 이거 먹어.”
영 평소와 같은 태도. 얘 다 기억하는거 맞지? 홍중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우영과 나만 끝없는 루프들을 기억했던 것처럼, 얘도 어제의 대화를 까먹었으면 어쩌지. 긴장한 홍중이 성화의 옆 얼굴을 오래 쳐다보는 동안, 성화가 다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있잖아.”
“응.”
“내일은 바다 가자. 땡땡이 치고.”
“…응.”
그제야 탁 긴장이 풀린 김홍중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흔두 번째 평행우주에서 겨우 전달한 소중한 마음. 온 평행우주를 돌아 만난 나의 '친구' 박성화. 외로움은 없고, 애정으로 충만했다. 성화의 다정이 채워준 것이다.
그래서, 박성화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홍중은 아주 많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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