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여상]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방법 - 이화규


00.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방법

“난 진짜, 중학교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인생의 명언인 것 같아.”

우영이 운을 띄웠다. 시선을 산에게 똑바로 고정한 채였다. 시선을 느낀 산이 고개를 들어 우영과 시선을 맞췄다. 아, 벌써 이어질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남들 다 짜장면 자기 혼자 짬뽕 먹으면.”
“어, 난 뭐 될 거야.”
“뭐라도 되는 줄 아는 애들이 있다고. 쟤처럼.”
“응, 그래도 난 짬뽕. 어쩔.”
“응, 저쩔.”
“어쩔.”
“저쩔.”
“어쩔.”
“저쩔.”

어? 꼭 단체생활에서 저렇게 튀려는 애들이 있어요. 나는 숙취 오져도 짜장면 시켰잖아. 덧붙이는 우영의 말은 진심이라기보단 장난에 가깝다. 입술 비죽 내밀고 우영을 못마땅하게 흘겨보던 산이 기어이 다시 입을 연다. 도발에 넘어간 셈이다.

“니는 꼭 면 떡져서 짜장면 베어먹어라.”
“어, 니는 흰옷에 짬뽕 국물 다 튀어라.”
“고춧가루 뭉친 부분 먹고 사레들려라.”
“집어먹는 탕수육마다 눅눅해라.”

이어지는 대화를 듣던 홍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해라 둘 다. 니네가 안 그래도 나 피곤해 죽겠어. 그제야 우영과 산이 입을 쏙 다물었다. 너네 진짜 유치하다. 성화가 옆에서 거들며 단무지 그릇을 내려놓았다. 나 거기 고춧가루 좀. 우영의 말에 여상이 팔을 뻗다 콜라 캔을 쓰러트리고 말았다. 헉, 안 흘렸어? 어어, 괜찮아. 산과 여상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보던 우영이 젓가락을 입술 끝으로 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우리 얼마 전에도 이렇게 싸운 적 있지 않냐?”
“너네 싸우는 게 하루 이틀이냐?”

그러고 보면, 요즈음 내내 이상했다.
시작은 약 일주일 전. 평일 중 딱 하루, 금요일 가장 첫 타임 수업. 신들린 클릭질로 듣고 싶던 강의 전부 신청한 정우영 시간표 단 하나의 오점. 일찌감치 강의실 입장해 엎드려 있다 강의 시작할 즈음에 고개를 들었더니 아니 글쎄,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다. 그제야 확인한 핸드폰 화면에 선명히 찍힌 목요일. 나 어제 목요일 수업 다 들었던 것 같은데? 이상한 걸 느낄 새도 없이 가방 챙겨 몰래 뒷문 나가려다 교수님한테 딱 걸려 죄송합니다 강의실 잘못 찾았습니다!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학기 초도 아닌 5월 중순에 온 타과 학우들의 눈길 받으며 퇴장. 그런가 하면 또 사나흘 전에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진짜 그 사람이 내 스타일은 아니거든여.”
“아직도 고백 안 했냐?”
“내가 형한테 말한 적 있었어요?”

최종호 얜 또 왜 이래? 바로 그 전 날 자기 붙잡고 아아메 한 잔 사주면서 몇 시간이고 짝사랑 상담하던 게 누군데. 그 이야기를 했더니 맹세코 자긴 얘기한 적이 없단다. 요즈음은 일상이 통째로 기묘한 기시감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인간 정우영의 삶이 뻔하대도 이렇게까지 기시감이 들 리가. 최산이랑도 얼마 전에 딱 똑같은 대화 나눴던 것 같은데. 복기해도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라 비슷한 기억만 잔뜩 떠오른다.

“너 누구랑 술 마셨길래 정신을 못 차려?”
“형이랑 마셨잖아.”
“술 덜 깼냐? 나 어제 하루 종일 과제 했는데.”

김홍중은 또 뭐야, 이 양반들이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아니, 이상한 건 나인가? 그제야 우영은 혼란스럽다. 아니 진짜로, 나 아직 숙취가 있다니까? 술 들이부은 속이 아직도 아퍼. 우영의 중얼거림에 산이 쯧쯧, 혀를 차며 제 짬뽕 그릇을 조금 우영의 쪽으로 밀어줬다. 혼술 작작 해라. 알콜성 치매 온다. 아, 혼술 아니라고!

“요즘 좀 이상한 것 같애.”
“뭐가?”
“자꾸 기시감이 존나 들어.”
“기분 탓이야, 그거.”
“진짜 나 어제 숙취가 안 깼다고. 김홍중이랑 먹은 거.”
“오늘 뭐 몸 상태 안 좋아?”
“아이, 진지하게 좀 들어봐.”
“홍중이형은 어제 못 잤어? 피곤해 보이네.”
“기시감 수준이 아니라니까.”
“어, 오늘 풀강이라. 뭐 음료수 마실 사람?”

아, 왜 자꾸 내 말 끊어? 완전 짜징나. 입술이 댓 발 나온 우영의 어깨에 손이 올라와 얹힌다. 그럴 수도 있지, 우영아. 손과 목소리의 주인은 강여상이다. 역시 내 말 들어주는 건 너밖에 없구나. 감동하기도 전에 우영의 시야 안으로 불쑥 젓가락이 들어온다. 근데, 너 군만두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어두 돼?
아, 진짜 완전 짜증나.







“다른 애들은?”
“오늘은 우리만 마시게.”

아 왜, 말할 거 있으면 빨리 말해애. 아직도 꽁해있던 우영이 괜히 툴툴거렸다. 쓰린 속 붙잡고 자취방 들어가 바로 쓰러져 잠들 셈이었는데. 너는 꼭 가야 한다길래 단체 술자리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 자연스레 홍중이 우영의 잔을 채우려 병을 들었다.

“나 오늘은 못 마셔. 속 쓰려.”

단칼에 거절한 우영이 제 앞에 놓였던 잔을 저 멀리 물렸다. 저 형은 진짜 괜찮은 건가? 저는 여전히 속이 쓰리고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숙취가 아닐 리 없지. 홍중은 잘만 제 잔을 채웠다. 진짜 한 잔 더 할 셈인가? 동아리의 모두가 짜고 저를 놀리는 것만 같다.

“우영아.”

이 형은 왜 또 이렇게 비장하게 나를 불러? 아닌 게 아니라, 성화는 뭔가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나 뭐 잘못했어? 낯선 형의 모습에 0.1초간 제 행실을 되돌아본 우영이 성화를 마주 봤다. 암만 생각해 봐도 딱히 꿀릴 게 없단 심산이다.

“언젠가 너한테 말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인 것 같아.”
“뭐, 둘이 사귀어?”

어쩐지, 아까 막 둘이서만 신호 보내더라. 쭉 술잔을 들이키던 홍중이 컥컥 숨을 내뱉었다. 미쳤냐? 따라오는 타박은 덤이다. 오가는 대화에도 성화는 그저 입술만 꾹, 어떤 대꾸도 없었다. 고성 속에 작은 성화의 한숨이 따라붙었다.

“우영아, 나는 미래에서 왔어.”
“뭔 소리야, 진심.”
“나는 미래인이야, 우영아. 지금보다 한참 먼 미래에서 온.”

성화는 미래인,을 힘주어 또박또박 발음했다. 이 형 헛소리하는데요? 우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홍중을 찾았다. 저랑 똑같이 뭔 미친놈 보는 표정으로 박성화를 봐줄 줄 알았는데 웬걸, 이젠 홍중마저 영 진지한 표정이다. 아니, 성화형은 몰라도 홍중이형 이런 거 연기 못하는데 뭔 일이지? 깜짝 카메라 연기 미쳤네.

“뭐, 형도 뭔 외계인이라고 해보시지?”
“나는 외계인은 아니고….”

뭔데 그럼. 멍하니 입술을 벌린 우영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외계인이 만든 안드로이드야.”

진짜 장난하냐?







로또 번호도 못 불러주고 내일 예지도 못 해준단다. 미래인이란걸 증명해 보라니까? 우영의 꼬장에도 성화는 그저 난처해했다. 형은 뭔 안드로이드가 술을 먹어? 기술력이 좋나 봐? 우영은 여전히 둘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시나리오 좀 더 잘 짜오지. 겨우 이걸 가지고 날 속이려고 들어? 때맞춰 우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집으려던 우영의 손을 성화가 만류했다. 진짜야, 우영아. 진지하게 들어줘. 답지 않게 구는 모습에 우영도 제 핸드폰 진동만 꺼 아까 물린 술잔과 함께 멀찍이 밀어두었다.

“뭐, 그래. 미래인이라 치자, 형은 얼마나 미래에서 왔는데?”
“대략 ■■■■ 쯤 되려나.”

와, 미친 쇠 긁는 소리. 등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뭐야, 형 뭐 숨기고 있지? 손 올려봐. 우영의 의심에 성화는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이상하다, 뭔 쇳소리 같은 거 났는데.”
“금기사항이라 그런가 보다.”
“아, 장난치지 말고. 형이 옆에서 뭐 틀었지?”

우영이 냅다 홍중 쪽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우영아, 삿대질은 하지 말고. 넵. 잽싸게 손가락을 내린 우영이 치근치근 성화 쪽을 향해 괜히 제 어깨를 들이댔다. 겁먹은 게 새삼 쪽팔려 부려대는 애교다. 에이~~~ 긍데 솔직히 이건 쫌 무섭긴 했다. 나 속이려고 준비 많이 했네 그치?? 그 꼴을 죄 지켜보는 김홍중은 답도 없다는 표정. 입 꾹 다문 홍중과 성화가 시선을 교환해 댔다. 거봐, 난감하지? 나 어떻게 속일지 궁리 중이지? 내가 다 알어. 여기 어디 카메라 있지?! 기세등등해진 우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그냥 더 해봐. 최산은 뭔데?”
“초능력자.”
“장난하냐 진짜? 참나. 형들이 안드로이드, 미래인이고 최산이 초능력자면 내가 아이언맨함.”
“…….”
“그럼 뭐, 강여상은 뭔데? 뭐 걔는 염라대왕이야?”

그쯤 되어서야, 다시 한숨 푹 쉰 박성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믿기 힘든 거 알아. 니가 바로 믿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왜 이렇게 진지하게 굴지? 우영은 눈앞의 형이 낯설다. 괜히 떨어져나온 소주 뚜껑 꼭다리를 공들여 빙빙 돌린다.

“있잖아 우영아, 여상이는 우리들이랑 달라.”

우리들? 단어를 속으로 곱씹는 사이, 반문할 새도 없게 성화가 다시 입을 연다.

“걔는 신이야, 우영아. 걔가 바로 이 세계의 법칙이야.“

5년 전에, 강여상이 이 세계의 법칙이 되었단다.
박성화의 말에 따르자면 5년 전 바로 그 가을. 온 우주의 법칙이 그 애로 재정렬되었다. 우주가 강여상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 애가 진심으로 믿는 것은 전부 현실이 되었단다. 덕분에 외계와 미래에서 잘 살고 있던 김홍중과 박성화는 그 날로 임무를 받아 이 지구의 이 시간대에 오게 되었다. 그 임무라는 건 강여상을 관찰하고 감시하고 지켜보고 보고하는 일 같은 것. 지난 오 년간 지켜본 강여상은 꽤 괜찮은 사람, 아니, 신이라는 게 두 형들의 의견.

“뭔 소리야. 걔는 지구를 네모나다고 믿는 애인데?”
“그러니까, 이런 거야. 여상이는 세계에 미래인이나 외계인, 안드로이드, 초능력자 같은 게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지.”

우영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황당하다.

“하지만 여상이는 동시에 속으로,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머릿속에서 두 감정이 줄다리기 하고 있는 거지. 지구가 네모나다고 말하는 여상이도, 실은 지구가 둥글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뜻이야.”

홍중의 말이 마침표를 찍는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야?

“나 하나 속이겠다고 스케일이 너무 큰 거 아냐?”
“우영아. 알아둬야 해. 이 세계의 모든 존망이 강여상에게 달렸어.”
“내가 여기서 무슨 리액션을 하면 되는데?”
“리액션이 아니라, 임마. 여상이한테 잘해.”
“그게 뭔 상관인데?”
“세계의 존망을 위해서야.“

그러니까 그걸 왜 하필 나한테 이야기하냐고오. 왜 이 깜짝 카메라의 대상이 나인데? 나는 잘 속지도 않고 의심두 많은데 왜 하필 나냐고. 무슨 리액션을 해줘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잖아. 나 지금 여상이한테 전화한다? 전화해서 너가 신이냐고 물어본다? 우영의 말에 홍중이 기겁을 했다. 그건 안돼! 성화는 혹시 우영이 정말 여상에게 연락이라도 할까 잽싸게 우영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여상이한테는 말하면 안 돼.”
“왜?”
“걔는 자기가 신인줄 몰라.”
“뭔 신이 자기가 신인지도 몰라?”
“여상이가 자신이 신인 줄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거야.”
“강여상이 지 스스로 신인 거 알게 되면 이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지는 거 아냐?”

가령 뭐, 범죄가 없어진다던가. 세상 사람들이 죄다 행복해진다던가. 듣고 있던 성화는 묘한 표정을 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다. 그 이전에 먼저, 홍중이 입을 연다.

“하지만 나쁜 결과가 나온다면 어떡할래? 강여상이 사실은 못된 사람이라면.”
“형도 걔 알잖아.”
“그래봤자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애야. 한 인간의 속을 어떻게 우리가 다 알아? 너 강여상을 다 안다고 자신할 수 있어?”

강여상이 얼마나 순하고 착한지 변명하려던 우영이 입을 다문다.

“여상이에게 스스로가 신인 걸 알리자는 의견들도 분명히 있었어. 근데 아무리 계산해 봐도 나올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서 보류됐지.“

곰곰이 생각에 빠지려던 우영이 퍼뜩 고개를 든다. 아, 잠만. 나 이걸 진지하게 듣고 있네. 형들의 장난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정신을 깨운다. 아 그래도 나 안 믿어, 못 믿어! 으름장에 성화가 우영의 핸드폰을 좀 더 스윽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니가 요즘 자꾸 기시감이 든다고 했지.”
“어.”
“실제로 지금 시간 좌표가 고정이 안 돼. 자꾸 하루가 다시 반복되고 있어.“

이걸 이렇게 써먹는다고? 이 형 순발력 엄청나네.

“그게 전부 강여상 때문이다?”
“응.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네가 이 루프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야.”

나? 나?? 나는 또 뭔데. 나 뭐… 돼? 우영의 말에도 김홍중은 표정 변화 하나가 없었다.

“강여상이 너를 선택했어. 너는 우리들이랑 달라, 우영아. 우리는 여상이가 만들어 낸 존재지. 너는 선택된 거고.”
“또 우리’들’?”
“…….”
“왜, 아주 그냥 나 혼자 인간이라고 해보시지?”

아까보다 세 배쯤 당황한 표정으로, 홍중과 성화가 시선을 교환한다. 미간 잔뜩 찌푸린 우영이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실화냐?







정우영은 5년 전의 강여상을 안다. 얼굴 말갛게 지금보다 세 배는 더 어리바리,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을 것 같던 애. 뒷자리 나란히 앉아 정우영 꾸벅 졸고 있으면 제 것도 아닌 옆자리 정우영 교과서 귀퉁이에 뭔 도라지인지, 인삼인지 나발인지 하는 캐릭터를 한가득 그려 넣던 애. 엉뚱한 소리를 밥 먹듯이 하고 별난 호기심을 셀 수 없이 가졌던 애. 박성화의 말에 따르자면 그 시점의 강여상은 이미 신이었다는 소리다.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신이 어디 있어. 뭣도 모를 고등학생 시절부터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를 돌아보며, 정우영은 침대 위에 누워 강여상의 못미더운 부분을 오백 개쯤 찾아낸다. 허술하고 엉뚱한 부분들을 손에 쥐고 들여다보며 거봐, 이런 신이 어디 있어. 제가 아는 신의 스테레오 타입과 일일이 비교해 가며 그 애가 인간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그럼 그렇지, 말도 안 되지, 아무리 그래도, 김홍중이 안드로이드고 박성화가 미래인이고 강여상이 신인데 나만 인간이라고? 말도 안 되지.







00.누가 목성에 도넛을 남기고 갔을까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지난밤이 까무룩 했다. 오후 두 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쌓인 알림 사이로, 일어나면 동방으로 오라는 성화의 메세지가 보였다. 두 눈 비벼가며 씻고 옷을 입고 모자를 눌러 썼다. 스무 걸음에 한 사람씩 아는 체를 했다. 한국인 아니랄까 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점심은 먹었냐 물었다. 동방까지 가는 20분 안에 한 손에는 아아, 한 손에는 마카롱을 들었다. 역시나 한국인 아니랄까봐, 늦은 시간까지 밥 못 먹었단 정우영을 불쌍히 여겨 선배 동기가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아니, 먹으러 가고 있다니깐.

“너 짜장 맞지?”

형들이 사주는 거면 걍 주는 대로 먹어야지 뭐. 우영이 냅다 덩그러니 놓인 짜장 앞자리에 앉았다. 웬 중식? 여기가 배달 젤 빨라서. 아. 납득하며 주머니 속으로 쑥 들어간 우영의 손끝에 핸드폰 아닌 뭔가가 걸렸다. 아 맞다, 마카롱.

“야, 여상아.”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상이 고개를 들었다. 웅, 왜? 우영이 여상의 쪽으로 가볍게 마카롱을 던졌다. 잽싸게 쥐어낸 여상은 손 안의 것을 확인할 생각은 안 하고,

“뭐야?”
“보면 모르냐, 마카롱.”
“…우영아, 여기에 뭐 탔어?”

아님 뭐 바닥에 떨어진 거 주워 왔어? 심각한 척 물어보는 여상의 표정에 우영이 푹 한숨을 쉬었다. 저건 꼭 챙겨줘도. 야, 이리 내. 성화형 주게. 아냐아냐 잘 먹을게! 근데 진짜 뭐 탄 건 아니지?

“오는 길에 만난 후배가 준 거야.”
“아하.”
“그게 다야?”
“고마워.”

엎드려 절받기네 이거. 됐다, 내가 강여상한테 뭘 기대하겠냐. 꿍얼거린 우영이 나무젓가락을 쭉 갈랐다. 뚝. 뚝? 고개 들어 바라본 소리의 근원지에 쪼개지다 말고 끄트머리 부러져 버린 나무젓가락 든 강여상이 보였다. 그러니까 젓가락이 11 모양으로 쪼개진 게 아니고 ι7 정도. 우영이 능숙하게 제 젓가락과 강여상 젓가락 바꿔 들고 테이블 가장 바깥쪽에 앉은 종호에게 거기 젓가락 새것 없냐? 물었다. 종호가 주변 이리저리 둘러보며 여분 젓가락을 찾는 동안 우영이 슥 훑어본 테이블엔 다들 고만고만하게 짜장 짬뽕 탕수육 군만두, 뭐야 저건. 볶음밥?

“야, 메뉴 통일 안 한 거 누구야?”
“응, 뭐 될게.”

아, 홍중이 형이었구나. 그럼 그럴 수 있지. 착석하십쇼 형님. 꼬리 내린 우영이 종호에게서 받은 젓가락을 두 쪽으로 쪼개 홍중에게 넙죽 건넸다. 형 피곤해 보이네? 산의 말에 착석하던 홍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엉, 나 오늘 풀강.”
“이상하네. 나 오늘 왜 이렇게 기시감이 들지?”

우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어제도 풀강이었어? 그럼 내가 지금 살아있겠냐? 밥이나 먹어라. 돌아오는 답에도 기시감이 쉬이 납득이 안 된다. 왜 이렇게 모든 상황을 다 어디서 본 것 같지? 중얼거리는 우영의 시야 안으로 불쑥 젓가락이 들어온다. 우영아, 너 군만두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어두 돼?

아오, 강여상.







“우영아, 이야기 좀 하고 가.”

성화의 말에 우영이 어정쩡한 자세로 나? 되물었다. 여기 우영이가 너 말고 또 있냐? 돌아오는 타박은 홍중의 것이다. 왜 이야기하자고 하지? 나 뭐 잘못했나? 근래의 제 행실을 죄다 짚어 본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한 게 없으니 딱히 꿀릴 게 없다는 판단. 어라, 이상하다. 최근에 또 이런 적 있지 않았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영이 부지런히 나무젓가락이며 종이컵 같은 것을 모았다. 아, 진짜 바로 얼마 전에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아 진짜 이상하네. 우영은 물이 절반쯤 남은 종이컵을 국물 남은 짬뽕 그릇에 부으려다,

“어 잠깐만. 나 형이 무슨 이야기 하려는지 알 것 같아.”
“어?”
“형, 미래인??”

냅다 성화를 향해 삿대질하는 우영의 손을 홍중이 급하게 잡아 내렸다. 제발조용히해. 귓가에 속삭이는 건 덤이다. 내가 왜? 황당하단 표정의 우영에게 홍중이 급하게 덧붙였다. 여상이가 있잖아.







“어떻게 알았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성화가 물었다. 적잖이 당황한 낯빛이었다.

“너무 다그치진 말고, 성화야.”

홍중이 탁자 위에 음료가 올려진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 몫의 음료를 든 우영이 괜히 눈치를 봤다. 아까 넘 큰 소리로 이야기했나. 아니, 잘못은 아니지?! 어깨 펴, 어깨 펴 정우영. 스스로를 다독인 우영이 괜히 코어를 빳빳이 세웠다. 제 입술 잘근잘근 깨물며 심각한 표정을 하던 성화가 딸기스무디를 두어 모금 마시곤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주변의 이목이 잠깐 쏠렸다. 심각한 표정으로, 비로소 성화가 입을 열었다.

“아, 오늘 딸기스무디 맛없다.”

아, 존나 맥 빠져. 역시 믿을 건 홍중이 형밖에 없구나. 우영이 시선을 곁의 홍중에게 주었다. 고개를 두어 번 절레절레 저은 홍중이 입을 열었다.

“너네 둘 다, 어디까지 기억나?”
“전부. 형은 미래인, 형은 안드로이드.”
“나는 기억 안 나는데.”
“형은 기억 안 나?!”
“니가 기억하는 게 이상한 거야, 우영아.”

그니까, 우리가 하루를 다시 살고 있는 게 맞다는 거지? 우영의 질문에 홍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왜이렇게 담담해? 우영의 질문에 홍중이 대답 대신 푹 한숨을 내쉬었다. 홍중이는 다 기억해, 우영아. 성화가 대신 답을 들려주었다.

“난 기억 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가 기록되는 거니까.”

그제야 홍중이 입을 열었다.

“말했듯이, 시간 좌표가 고정되질 않아.”

운을 띄운 홍중이 가볍게 음료로 목을 축였다. 앞으로 할 이야기가 길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 루프 중에 성화가 너한테 우리의 정체를 알리기로 결심한 건, 약 83번 정도 돼.”
“내가 그렇게 많이 말했다고?”
“내가 그렇게 많이 들었다고?”
“근데 우영이 네가 이걸 역행 후에도 기억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성화도 제법 홍중의 말이 당황스러운 눈치다.

“그럼, 지금 최소 84번째 오늘이 반복되고 있는 거야?”
“정확히는… 366일. 이번 같은 루프는 나도 처음 겪어.”

1년을 넘어갔다고? 성화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래인이라는 박성화에게도 이 사실은 큰 충격인 모양이다. 저 형은 이 루프 속에서 몇 번이나 저 사실을 알고 충격을 먹었을까? 우영은 새삼 궁금했다.

“잠깐만, 그럼 형은 수요일만 1년을 겪은 거야?”
“…나 오늘 풀강이다.”

오…. 끔찍하겠다…. 어쩐지 사람이 죽어가더라. 이쯤 되면 믿지 않을래도 믿을 수밖에 없다. 중식 지겨워. 이제 딴 것 좀 먹고 싶어. 여상이는 왜 하필 중식에 꽂힌 걸까? 홍중이 길게 푸념했다. 안드로이드가 무슨 식사의 맛이 중요해? 하려던 우영이 홍중의 표정을 보고 핀잔은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진짜 간절한 표정이어서.

“형 말은 오늘이 또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거네?”
“응. 너랑 성화가 또 전부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거지.”
“또 내가 알아야 하는 게 있어? 전부 들려줘.”
“더는 안돼.”

까다롭네. 이것도 뭐 성화형의 금기사항 같은 거야? 우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래인이고 안드로이드고, 행동이 자유롭질 못하구만. 비슷하지 뭐. 답한 홍중이 푹 한숨을 쉬었다. 저도 퍽 답답한 모양이다.

“그럼 형이 판단하기에 진짜로 도움이 필요하면, 그땐 알려줘.”
“…그래.”

그 정도는 괜찮겠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홍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42.도넛 구멍 안에 코끼리 넣기

동방에서 잡혀 온 정우영은 그대로 동방으로 돌려보내졌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오늘은 여기 있지 뭐. 피곤함도 아까의 대화로 싹 다 잊혀진 지 오래다. 소파에 드러누워 누가 기부한 건지도 모를 토끼 인형 볼을 의미 없이 쭉 늘렸다 줄였다, 새삼스레 동방의 모든 것을 구경하던 우영의 시선 끝에 윤호가 걸렸다.

“너는 왜 안 가?”
“나 공강 애매하게 떠서 쉬다 가려고.”

글쿠낭. 쉽게 납득한 우영이 윤호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봤다. 핸드폰에 시선 고정하고 카라멜 마키야토 빨대로 쪽쪽 빨아들이는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너는 정체가 뭐냐?”
“뭔 소리야? 나는 정윤호지.”
“아니, 진짜 너.”

윤호가 빨대 물고 있던 그대로 눈만 돌려 우영의 눈치를 봤다. 얘가 뭘 아는 건지, 가늠하기 바쁜 눈치다.

“나는 윤호라니까?”
“그니까 정체가 뭐냐구.”
“…어떻게 알았어?”

빨대에서 입술 뗀 윤호가 물었다. 티 났어? 나 티 안 냈는데…. 목소리의 끝이 기어들어 갔다. 그 정도로 비밀이야? 덩달아 심각해진 우영이 입을 뗐다.

“티 안 났어, 형들이 말해줬어.”

그제서야 윤호의 표정이 풀렸다.

“나는 사랑이야.”
“사랑이?”

그게 뭐야? 물으려던 우영의 두 눈이 커졌다. 잠깐만, 홍중이 형이 키우던 그 강아지 사랑이? 윤호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년 전, 김홍중 체면 차릴 정신도 없이 펑펑 울던 날. 원래 사랑이에게 주어졌던 인간보다 훨씬 짧은 생. 눈물 콧물 쏟아내는 홍중이형 앞에서 강여상이 형 위로한답시고 사랑이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 거예요, 했던 말이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단다. 김홍중은 다음 날 기상했다 눈 앞에 있는 커다란 정윤호 때문에 슬픔 되새길 틈도 없이 비명 한 번 세게 지르고 하루를 시작했고.
김홍중 사촌동생이라는 적당한 위장도, 편입생 신분도, 거기에 정윤호, 라는 이름도 형이 줬댄다.
인간의 규칙 사소한 것 하나하나 배우느라 많이 혼도 났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 자기가 인간이 아니란 티가 난 건 아닐까, 걱정했다고.

“아냐, 너 잘 숨겼어.”

별명이 대형견인 것 치곤 잘 숨겼지 뭐. 아니면 그냥, 이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할 리 없지, 하는 강여상의 마지막 이성이 숨겨준 것이던가. 아무튼 우영의 긍정적 대답에 맘이 놓인 윤호가 그제야 비로소 웃어 보였다. 윤호가 정말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우영의 속만 착잡해졌다. 어쩌다 이 모든 걸 잊지 않게 된 걸까?







새벽 두 시 반. 어차피 또 잠자리 누웠다 눈 뜨면 모든 게 리셋될 거, 연습으로 치고 솔랭이나 열심히 돌리자고 오늘도 소환사의 협곡에서 전쟁 중이던 우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확인하느라 눈 돌린 사이 블츠 그랩에 끌려가 상대 원딜에게 서폿의 목숨까지 2킬을 내줬다. [ㅇㄷㅊㅇ] 네 글자 채팅에 눈 돌아가려다 어차피 내일이면 리셋이다, 간신히 이성줄 붙잡으며 받은 전화에선 최산이 지금 당장 근처의 초등학교로 오라는 뜬금없는 말만 남겼다. 뭐야? 되묻기도 전에 전화는 뚝. 초등학교? 중얼거린 우영이 고민할 틈도 없이 가볍게 엔터, 채팅창을 열었다.

풍동이상한놈 [ㅇㅇ 원딜차이 에바니까 꺼져줌 니들끼리 ㅅㄱ]

똑같은 시간 속에 갇혔다는 거, 생각만큼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고 우영은 생각했다. 그때만큼은.







가로등 불빛 아래 사람의 인영이 흐릿했다. 볼캡 눌러 쓴 폼이 딱 봐도 최산이다. 뭐냐? 대뜸 묻는 말에 최산이 그저 하하 웃었다.

“너 아까 나보고 누구냐매.“

아까 문득 보내놓은 메세지를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되게 빠르게 알려주네. 윤호처럼 부정하지도, 성화처럼 망설이지도 않는 태도였다. 얘도 홍중이형 같은 건가? 형들이 얘는 초능력자랬는데. 기억을 되짚는 사이, 산이 허공에 무언가를 덧그렸다. 손끝이 파랗게 빛나지도, 무언가가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뭐야?”
“내 손 잡아봐.”

갑자기? 물으면서도 우영은 산의 손을 맞잡았다. 서로 주고받는 온기가 뜨뜻했다. 우영의 손을 잡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산이 우영의 두 눈을 가렸다. 뭐야, 뭔데? 괜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무서움을 상쇄하려 우영이 입을 열었다. 말이라도 좀 해주던가, 갑자기 눈부터 가리면 어떡해?? 뭐 하는 건데 말 좀 해줘 봐,

“뭔데? 아이, 설명이라도 쫌. 악!”

우영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떨어졌다. 떨어졌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평지에 서 있었는데. 앞으로 한 발자국 당겨졌다고 이렇게까지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진 않을 텐데. 이게 뭐지? 추락한다,는 느낌이 들기 무섭게 산이 잡고 있던 손을 위로 당겼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자동차처럼 몸이 갑자기 멈춰 섰다. 야 산아 이거 뭐냐??? 등 뒤로 식은땀 주욱 흐르기 전에 산이 두 눈 가리고 있던 손을 떼주었다. 우영이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두 눈을 떴다. 발밑으로 빌딩 숲이 펼쳐져 있으면 어떡하지? 나 진짜 기절할 것 같은데. 걱정이 무색하도록, 우영은 여전히 땅 위에 발 딛고 서 있었다. 차이점이라곤 눈 감기 전엔 정문 밖이었는데, 눈 뜬 후에는 운동장에 서 있다는 것 정도랑,

“뭐야? 어떻게 여기 온 거야?”

도착한 곳이 우영이 졸업한 고등학교라는 것 정도.

“여기는 폐쇄 공간이야.”
“그게 뭔데?”

우영이 비로소 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몇 년 전, 제가 기억하던 풍경과 똑같지만 조금 싸늘한 분위기가 드는 게 기분 탓인지, 실제인지. 정말 채도가 평소보다 더 낮아 보이기도 하고…. 상황 파악을 하는 즈음, 땅바닥이 크게 울렸다. 뭐야, 뭐야??? 아까보다 세 배는 다급하게 우영이 산의 팔을 붙잡았다.

“쟤 보이지.”

산이 가리키는 곳엔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서 있었다. 학교 건물 위로도 몇 미터는 더 높게 뻗어있는 인영. 저걸 인영이라고 불러도 되나? 엄청 둥글고 하얗고. 좀 뭐랄까, 바람이 빵빵한 풍선 인형 같이 생겼는데.

“저게 뭐야?”
“여기는 폐쇄 공간이야. 나는 쟤를 해치우는 거고.”

산이 아까 했던 말을 또 반복했다. 아니 그니까 저건 뭐냐고. 성격 급한 우영이 풍선 인형을 향해 냅다 손가락질했다.

“여기는 쉽게 말하면, 여상이의 마음속 같은 거야. 현실에 존재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공간이지.”
“개어렵네. 쉽게 좀 말해봐.”
“음, 그러니까, 여상이가 오늘 하루가 마음에 안 들었다거나, 속상한 일이 있었다거나 하면 쟤가 나타나. 우리는 큰 도라지라고 불러.”
“큰도… 뭐?”

뭔 네이밍 센스야? 되묻는 우영의 말에도 대꾸는 없었다. 우영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풍선인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꼼짝 않은 채였다. 표정도 없고, 움직임도 없어 그저 미술 작품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무 짓도 안 하는데, 저걸 왜 해치워?”
“그냥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무슨 일?”
“여기가 폐쇄 공간이긴 하지만, 현실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거든. 쟤가 여기서 뭔가 행동을 하면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끼쳐.”
“어떻게 되는데?”
“글쎄, 우리도 잘은 몰라. 아마 큰 도라지가 온 세계를 다 부숴버리면, 여상이가 힘들어하지 않는 세계로 모든 우주의 법칙들이 전부 다 다시 재구성되지 않을까, 추측만 하고 있어.”

그 우주에 우리가 여전히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노릇이니까. 최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홍중이형 말에 따르면, 다른 평행세계의 큰 도라지들은 좀 폭력적이래. 다 때려 부순다는데, 내가 본 여상이 큰 도라지들은 다 저래. 좀 많이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하는 날에는 땅 파긴 하는데 그마저도 얼마 못 가고.”
“…강여상이 스트레스를 받아?”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 우영이 입을 열었다. 얘 진짜 뭐래? 산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우영을 쳐다봤다.

“쟤 지금 커, 안 커.”
“존나 크지.”
“쟤가 클수록 여상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거야.”

오늘은 좀 많이 크긴 하네. 최산의 말에 우영이 다시 풍선 인형의 크기를 가늠했다. 원래 크기가 어떤 줄을 모르니 비교도 못 하겠네.

“아, 저거 또 멍때린다.”
“저게 멍때리는 거야?”
“엉. 자주 저래. 애가 좀 맹해.”

산이 익숙하다는 듯 덧붙였다. 강여상이랑 똑같네. 생각한 우영이 다시 풍선 인형을 올려다봤다. 좀 멍때리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있잖아, 여상이는 생각이 아주 많은 애야. 평온해 보여도 속에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 수가 없어. 나는 그냥, 큰 도라지를 볼 때면 여상이가 오늘은 많이 힘들었구나, 짐작이나 겨우 해보는 거야.”

우영은 그냥 괜히, 서운했다. 이 정도로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었으면 말 좀 하지. 모르긴 몰라도, 눈앞의 큰 도라지인지 풍선 인형인지가 유달리 거대한 크기라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가 있다.

“…근데 왜 큰 도라지야?”
“여상이가 맨날 그리는 도라지 있잖아, 그거랑 닮아서.”
“헤헷몬?”
“그거 이름이 있었어?”

산이 물었다. 우영은 대답 없이 큰 도라지와 산을 번갈아 쳐다보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산의 질문에 우영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있지, 혹시.

“헤헷몬이라는거 진짜 존재해?”

산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도 웃어대는 통에 우영의 기분만 상했다. 야, 그만 웃어라. 야, 최산. 그만 웃으라고. 한참 웃던 산이 눈물을 닦았다.

“그건 존재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해.”
“뭔소리야?”
“물론 우리가 사는 세계엔 없는데, 이 폐쇄 공간 안에 존재하거든.”

지금은 어디 있어? 묻는 우영의 질문에 산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나도 모르지. 큰 도라지랑 싸우고 있다 보면 도와주러 가끔 나타나. 여상이는 아주 다정한 애야, 나 혼자 싸우게 두질 않거든.”

그 쪼끄만 게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될까. 작은 헤헷몬들이 큰 도라지에 매달려 싸우는 모습을 상상한 우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강여상이 한때 믿었던 모든 존재들이 이곳에 있어. 헤헷몬도, 산타도, 카드캡터 체리도."

산의 말에 우영의 침묵이 길었다. 큰 도라지와 헤헷몬과 산타와 카드캡터 체리가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라니. 참, 이걸 뭐라고 해야할지. 정말 강여상 머릿 속 같네. 그 애의 엉뚱한 면모는 신으로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젠 정말 강여상이 신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나. 우영의 기분만 착잡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우영은 왠지 잠에 들기 싫었다.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고. 덕분에 최산이 풍선 인형을 해치우는-그건 해치운다기보다는 하나의 퇴마 의식 같았다.- 것을 끝까지 앉아 지켜봤다. 미끄럼틀 가장 꼭대기에 앉아 하늘로 흩날리는 풍선 인형을 바라보는 우영의 발치로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헤헷몬들이 여럿 모여들었다. 우영은 그중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살살 볼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헤헷몬이 슬쩍 몸을 반대편으로 뺐다. 진짜 강여상이랑 똑같네. 헛웃음 친 우영이 다시 살며시 헤헷몬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강여상이 만들어 낸 존재를 강여상은 못 보고 나만 보고 있다니. 이상한 일이야. 강여상이 한때는 믿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 것들이 모두 이 세계에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버젓이 현실에 있는 윤호의 존재는, 정말 여상이 간절히 사랑이의 환생을 믿었다는 것이 된다.

여상이는 아주 다정한 애야.

우영은 산의 말을 다시 복기한다. 강여상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알게 된 여상의 모든 것은 죄다 낯선 것투성이다. 내가 알고 있던 강여상은 누구지? 우영은 제가 알고 있던 여상을 떠올린다. 여상의 웃는 낯. 곤란할 때 짓는 표정. 삐졌을 때 마중 나오는 입술. 아주 인간다운. 그런가 하면 또, 선한 천성. 천진한 낯. 섬세하진 못해도 다정한 구석. 그런 것들은 오늘 알게 된 여상과 별반 다르지도 않은 것 같고.

그런데도 여상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자고 일어나면 이걸 모두 잊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인 것 같아. 생각하며, 우영은 여전히 가만 서 있는 풍선 인형을 바라보았다.







01. 도넛을 삼킨 보아뱀

오후 두 시. 눈 뜨자마자 우영은 핸드폰을 열었다. 어제의 일들이 꿈을 꾼 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박성화 대화창 열어 [ㅋㅋ미래인] 다섯 글자 보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전화가 왔다. 뭐냐 너?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황당한 음성 들으며 우영은 기분이 째졌다. 이 형 또 기억 못 하나 봐. 진짜 나랑 김홍중만 기억하는 거네. 뭔가 선택받은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비록 저는 아무 능력도 비밀도 없는 인간이라지만.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성화가 한참 열을 내는 바람에 다시 또 동방가는 길을 올랐다. 어제? 어제라고 해도 되나. 오늘이 반복된 거니까 어제의 오늘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이야기 해도 이상하게 느껴지긴 매한가지다. 또 스무 걸음에 한 사람씩 우영을 아는 체했다. 아메리카노 감사하게 넙죽 받아댄 우영이 제 손에 쥐어진 마카롱 내려다보다 결국 카페 계산대 앞에 섰다. 초코 마카롱 하나 주세요. 혹시나 부셔질까, 마카롱 소중하게 쥐고 우영이 언덕길을 올랐다.

모든 것을 전부 기억한 채로,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내 꺼 뭐야? 짜장 맞지? 땡큐~”
“우영이 오늘 기분 좋네~”
“엉, 엉아가 그럴 일이 있다.”

너 짜장 맞어. 성화가 떨떠름한 어투로 대답했다. 여전히 우영에 대한 의심을 놓지 못한 눈치였다. 에이, 형 왜 그래. 나 우영이야. 형 동생 우영이. 어? 넉살 좋게 답한 우영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콧노래를 불렀다. 괜히 지나가는 길엔 윤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우리 윤호. 영문을 모르는 정윤호만 제 맞은편 송민기와 눈을 마주치며 만면에 물음표를 띄웠다.

산의 말에 건성으로 답하며 우영이 짜장 앞에 착석했다. 그러고 보니까 송민기랑 최종호의 정체가 뭔지는 아직도 모르네. 나중에 물어봐야지. 생각하며 아이스아메리카노 쭉쭉 들이키다 강여상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얘가 이 세계의 신이라는 소리지? 갑자기 훌쩍 멀어져 버린 마음의 거리. 돌연 낯설어 보이는 얼굴을 눈싸움하듯 한참 들여다보려니, 여상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우영이 마카롱 쥐고 있던 제 손을 여상의 쪽으로 내밀었다.

“자.”
“뭐야?”
“마카롱. 너 먹으라고.”
“…우영아, 나한테 뭐 잘못했어? 아니면 이거 뭐 바닥에서 주운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주면 그냥 먹어라. 너 좋아한다고 초코맛 샀으니까.”
“응.”

우영의 웃음이 터졌다. 아, 내가 아는 그 강여상 맞네. 어쩌면 난 이걸 확인받고 싶었나 봐. 우영이 여상에게서 제가 아는 모습을 찾아낸 사이, 동아리방 안으로 홍중이 발을 디뎠다. 김홍중 얼굴 확인한 우영의 얼굴에 생생히 생기가 돌았다. 홍중이 형!

“으구 우리 형, 풀강 수고했쪄요.”

지나가는 김홍중 엉덩이 팡팡 쳐가며 덧붙인 우영의 말에 죽을래? 홍중이 즉답했다. 우영이 뻔뻔하게 윙크해 가며 사랑의 총알 뿅뿅, 홍중을 향해 날렸다. 형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이제 나도 전부 기억한다 이거야. 정우영이 일방으로 품은 일종의 동지애. 대번에 관대해진 우영이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곧게 뜯은 제 젓가락을 여상에게 쥐여주었다.







학교 앞 카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우영은 열심히 성화에게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홍중이 없었더라면 설명은커녕, 자신이 정우영의 탈을 뒤집어쓴 어떤 악의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증명해야 했을 것이다. 동지가 생겼으니 기뻐할 줄 알았던 홍중은 오히려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이 형, 왜 그래~ 우영이 잔뜩 애교 섞어 팔꿈치로 옆구리를 푹푹 찔러댔다.

“네가 기억하면 뭔가 변화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홍중의 말에 성화도 쉽게 수긍했다. 그러게.

“어떤 변화?”
“내일이 올 줄 알았어. 근데 어쩜 이렇게 똑같지?”

아닌게아니라, 눈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죄 되짚어봐도 어제와 대강 얼개가 비슷했다.

“이것만으론 부족한가?”

홍중의 질문에 딱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단 중얼거림에 가깝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면 반가워하고 기뻐할 줄 알았는데. 우영도 덩달아 기운이 다 빠졌다.

“그래도 뭔가 변화가 생긴 거잖아,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성화의 말에 홍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시간은 왜 돌아가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이걸 모두 기억하는 걸까? 형들의 한숨과 걱정을 너무 많이 목격한 탓인지, 우영도 덩달아 생각이 복잡했다. 아, 맥 빠져. 나는 내일도 이걸 기억하게 될까? 내일도 오늘의 반복일까? 그럼 그걸 내일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내줄 수 없는 질문들뿐이었다.

왜 하필 나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나는 선택 된 존재라고 했지. 강여상이 나를 선택했다고. 그 선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영은 모른다. 신과 친구라니. 이게 무슨 만화 속도 아니고. 정우영은 일요일에 오면 간식 준다는 유혹에도 교회 근처를 얼씬해 본 적 없었는데. 신하고 친구면 막, 소원도 들어주고 그런 거 아닌가? 우영은 초등학생 시절, 독서 시간에 [램프의 요정 지니를 만난다면 부탁하고 싶은 세 가지] 질문에 [복권 당첨, 소원 백 가지로 늘려주기, 투명 인간으로 변신해서 정동영 뒤통수 백 대만 때릴 수 있게 해주기]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 강여상이 신이라면 지니보다 더 쎈 거 아닌가? 진짜 소원 개수 상관없이 다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냐? 헐, 그럼 짱이겠다. 초등학생도 생각하지 않을 ‘신VS지니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정우영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영이 [번호 6개만 불러봐]
영이 [로또 사게]
강여상 [?? 6 9 11 15 23 26]

숫자 분포 실화냐? 우영은 허, 혀를 찼다. 이게 진짜 당첨이면 웃기긴 하겠다.

영이 [엉아 1등 되도록 기도 좀ㄱㄱ]

읽어놓고 답을 안 하네 얘. 기대도 안 했다. 그러고 보니까 내일이 안 오면 어차피 로또도 추첨을 못 하잖아? 아직 똑같은 날을 별로 안 겪어봐서 그런가, 하루를 루프중이란 사실을 자꾸 잊었다. 하필이면 또 반복되는 날이 공강이기도 했고. 그냥 갑자기 주어진 방학 같아. 에이, 로또 1등은 물 건너갔네. 그래도 번호 외워뒀다가 시간이 가기 시작하면 꼭 사봐야지.

근데, 신은 누구한테 기도할까? 우영은 문득 그런 게 궁금했다.







시간이 반복되기 시작한 지… 몇 번째더라? 기록해도 눈 감았다 뜨면 모든 게 다 리셋이니 슬슬 가물가물했다. 이따 홍중이형한테 물어봐야지.

거의 백 퍼센트의 확률로, 눈을 뜨면 동방으로 오라는 연락이 와 있었다. 대부분 성화에게서였고 때로는 윤호에게서, 아주 가끔은 최산에게서였다. 동방까지 올라가는 길을 정문으로 택하면 스무 걸음에 한 사람씩 정우영을 아는 체 하고, 누군가는 꼭 아아 하나를 쥐여주었다. 가끔은 마카롱이 따라왔다. 후문을 택하면 아는 사람을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도착하면 거의 백 퍼센트 중식으로 밥을 먹었고 우영의 메뉴는 짜장 아니면 짬뽕이었다. 밥을 먹고 나면, 홍중과 성화와 함께 회의 아닌 회의를 했다. 언젠가는 강여상에게 게임 하자며 전화가 왔고, 언젠가는 종호가 연애 상담을 해달라며 우영을 불러냈다. 무엇도 하기 싫은 날엔 송민기 자취방에 쳐들어가 핸드폰 꺼놓고 낮잠을 잤다. 가끔은 윤호에게 네 정체를 알고 있다는 발언으로 그 애를 깜짝 놀래켰고, 때로는 최산이 도착하기도 전에 초등학교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최산은 정우영을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시도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또 쉽게 정우영을 폐쇄 공간 안으로 들여보냈다. 평지에서 추락하는 감각은 매번 낯설었다. 정우영이 큰도라지를 해치우는 최산을 지켜보는 동안 헤헷몬들은 정우영의 머리 위에서 춤을 췄다.

김홍중처럼 모든 걸 기억하는 같은 일상에 슬슬 지쳐갈 무렵, 변화는 의외의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저거… 원래 저렇게 컸나?”

폐쇄 공간 안에 막 들어선 우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큰 도라지 본 적 있어?”

어어, 니가 보여줬지. 대답한 우영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의 건물과 견주어봐도 저가 기억하는 것보다 크기가 제법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한 번에 쑥 큰 건가? 아니면 지금까지 차근차근 커지고 있었나? 정우영이 고민하는 동안, 최산은 큰 도라지를 해치우기 위한 의식을 시작했다. 홍중이형한테 말해야겠지. 뭔가 변화가 생겼다고 좋아하려나, 아니면 수수께끼가 늘었다고 괴로워하려나. 힌트라도 됐으면 좋겠다. 고민하는 사이 몰려든 헤헷몬들이 정우영의 바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등반을 시작했다. 우영이 손을 뻗어 헤헷몬이 제 손바닥 위에 올라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깨 위에 헤헷몬을 내려준 우영이 다음 헤헷몬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헤헷몬들은 일제히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런 적은 처음인데. 우영이 헤헷몬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 큰 도라지와 눈이 마주쳤다.

큰 도라지가 정확히 우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시선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형들한테 연락해야 하나? 폐쇄 공간 안에서 핸드폰이 터지던가? 우영이 핸드폰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어느새 우영의 앞까지 다가온 큰 도라지가 우영을 한 품에 껴안았다. 아주아주 커다란 마시멜로우 속에 파묻히는 느낌이었다.







오류번호 000042. 그리고 도넛이 있었다

우영은 눈을 떴다. 싸늘하다 못해 한기가 느껴졌다. 침대 옆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찾았다. 오전 두 시. …오전 두 시? 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네. 루프를 자각한 이후로 이 시간에 기상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나 지금 왜 집이야? 분명 폐쇄 공간 안이었는데? 우영이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형들에게 연락 할 참이었는데, 24개월 할부 아직 끝나지도 않은 폰이 온통 먹통이었다. 자취방 문이라도 두드릴 심산으로 후드 집업 아무렇게나 뒤집어쓴 정우영이 제 운동화 대충 구겨 신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싸늘한 온도. 묘하게 낮은 채도. 아, 이거 폐쇄 공간이구나.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우영이 초등학교로 향했다.

초등학교에 다다르기도 훨씬 전부터 우영은 큰 도라지를 찾을 수 있었다. 아까-혹은 어제- 저를 껴안았던 큰 도라지보다도, 웬만한 빌딩들보다도 한참 커다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쟤 위치가… 뭐지? 초등학교 아닌 것 같은데. 큰 도라지를 이정표로 삼고 숨이 벅차도록 뜀박질 한 우영이 제 대학교 운동장 앞에서 숨을 골랐다. 운동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야, 최산!”

뒤돌아보는 얼굴은 최산이 아니라, 강여상이다.

어라, 얘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형들은 강여상이 자기 스스로가 신인 걸 알면 안 된댔는데. 좆됐네. 이걸 어떡하지? 정우영이 머리 굴려 가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 동안, 여전히 꿈꾸는 것 같이 몽롱한 얼굴로 여상이 입을 열었다.

“신기하다. 자고 일어나니까 여기야.”
“너 안 추워?”

강여상은 위아래 세트로 맞춰 입은 잠옷 차림새였다. 우영은 제가 여즉 외출복 차림인 데에 작게 안도했다. 질 좋은 잠옷 갖춰 입은 애 앞에서 목 늘어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은 아무래도 좀 부끄럽지. 응, 괜찮아. 여상이 천천히 대답했다.

“이거 꿈인가?”
“어어, 비슷해.”

그렇구나…. 여상이 느릿하게 눈을 꿈뻑였다. 잠이 다 깨지 않은 모양새였다.

“진짜 꿈이구나…. 어쩐지, 너를 생각하니까 네가 나타났어.”

나를 또 왜 생각하셨대? 멋쩍은 우영이 괜히 할 말 찾느라 눈알 굴리는 동안 여전히 졸린 얼굴이 깜빡깜빡, 느리게 하품했다. 여상은 평소처럼 느긋한 태도였다. 큰 도라지가 안 보이는 건가? 우영은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눈 깜빡거리며 우영을 바라보던 여상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근데… 그거 닮았다.”
“그거?”
“미쉐린 타이어 광고 나오는 애….”

에이씨, 빼박 보이네 얘. 저가 다 아찔했다. 질끈 눈 감는 동안 두 손은 부지런히 제 바지를 더듬었다. 핸드폰, 핸드폰…. 황급히 꺼낸 핸드폰은 여전히 먹통. 아, 맞다 씨발. 아까도 안 됐었지 이거. 정우영이 핸드폰 모서리를 때리고 흔들며 기계가 옛말대로 맞고 정신을 차리길 바라는 동안, 멍하니 우영 하는 꼴을 지켜보던 여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여상은 곧 큰 도라지가 있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허공을 걷는 듯한 모양새였다.

“야, 뭐해?”

화들짝 놀란 우영이 여상을 붙잡았다. 큰 도라지를 구경하는 내내 우영은 큰 도라지에게 접근할 생각 조차 못 해봤는데.

“가까이 가보려고.”
“위험하면 어쩌려고?”
“으응, 괜찮을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답한 여상이 다시 큰 도라지를 올려다봤다. 큰 도라지도 빤히 여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여상과 우영을. 우리 쟤랑 눈 마주치지 말자. 여상의 시야가 까맣게 잠겼다. 우영이 손을 뻗어 눈 앞을 가린 탓이다.

“왜?”
“좀 그래.”
“뭐가?”
“아이, 뭐라고 설명은 못 하겠는데 나는 저거 쫌 그래.”

여상이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뭔가 맘에 들지 않다는 무언의 시위다. 여상이 우영의 손을 잡아 끌어내렸다.

“우영아, 쟤 무서워?”
“무서운 게 아니고.”
“그럼?”
“저거 속을 모르겠어.”

무섭다기보단 그 쪽이 가까울 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쁜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웃고 있잖아.”
“어?”
“쟤, 웃고 있는데….”

우영도 여상도, 서로의 말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웃고 있다고?”
“활짝 웃고 있는데. 기분 좋은 것 같아.”
“…저게?”

진짜 존나 전혀 하나도 모르겠는데? 걍 존나 수상하게 생겼는데?
황당하단 표정의 우영을 앞에 두고 여상은 제가 더 어이가 없단 표정이다.

“너는 저게 안 이상해?”
“신기하긴 한데, 이상하진 않아.”

꿈이라서 그런가? 여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우영이 여즉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 우영이 제 핸드폰 액정을 황급히 들여다봤다. 미친, 작동되나?

[우영아]

배경 화면 위로 흐릿하게, 곧 지워질 것 같은 글씨였다.

[대답도, 답장도 하지 마. 여상이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여상이가 세계를 재구성 중이야]

홍중이형인가? 발신자를 짐작한 우영이 그제야 슬쩍 여상의 눈치를 봤다.

[실은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어]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어, 미안해]

우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한 것보다도 심각한가 본 데. 여상은 다시 큰 도라지를 향해 한 발자국씩을 내딛고 있었다. 저걸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상이는 매번 시간을 루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계를 재구성했어.]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여상이가 선택한 건 너뿐이야.]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우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정우영은 이런 초자연적 현상과는 거리가 한참 먼 그냥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결론이 뭐야? 우영의 생각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핸드폰 액정이 다시 글자를 쏟아냈다.

[나도, 성화도, 산이도. 그 누구도 그쪽 세계에 지금 간섭할 순 없어.]
[이 우주는 재구성 될 거야.]
[할 수 있다면, 멈춰줘.]

그제야 어렴풋이, 그 우주에 우리가 여전히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노릇이니까, 하던 최산의 목소리가 스쳤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속으로 물어도, 이제 핸드폰은 아무 대답이 없다. 정우영의 가족과 친구들이 온통 다 이 우주에 있는데. 우주가 무너지고 재구성 될 세계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없을지도 모른다니.

“야, 강여상!”
“응?”

우영의 부름에 여상이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바닥에 길게 끌린 강여상의 바짓단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쟤 지금 저러고 여길 나온 거야? 인상 팍 찌푸린 우영이 여상을 향해 걸었다. 주섬주섬 여상의 앞에 쪼그려 앉아 대뜸 잠옷 바지의 밑단을 접어 올렸다. 조금 당황한 듯, 다리를 뒤로 빼던 여상의 발목을 우영이 다시 잡아끌었다. 아, 가만히 좀 있어봐. 양쪽을 두어 번 접어 올리고서야 만족한 정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어휴 진짜, 이런 애도 신이라고.

말없이, 한참 물끄러미 우영을 바라보던 여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꿈 맞지?”
“꿈이지, 그럼. 넌 쟤가 현실로 보이냐?”

뻔뻔하게 대답한 우영이 고갯짓으로 큰 도라지를 가리켰다. 여상이 큰 도라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여상이 다시 느릿하게 우영의 쪽을 바라보았다.

“근데 왜 난 네가 자꾸 너 같지?”
“그게 뭔 소리야?”
“꿈속의 네가 아니라, 현실의 너 같애….”

왜 이런 데에서 감이 좋은 거야? 빠르게 눈을 굴리며 우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꿈속의 내가 뭐 어떤데?”
“꿈속에선….”

아니, 얼굴은 왜 또 빨개져?
네 꿈속에서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우영이 따지려는 순간, 땅이 크게 울렸다. 예고 없는 지진에 우영의 몸이 휘청거렸다. 여상이 팔을 뻗어 우영을 붙잡았다. 둘의 시선이 서로를 지나 큰 도라지를 향했다.

큰 도라지 바로 앞, 학교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우영이 손을 뻗어 여상의 손목을 잡아챘다. 일단은 도망가자. 뭐라도 시간을 벌어봐야지. 우영의 생각과는 다르게, 여상은 자리에 우두커니 못 박힌 채다.

“왜?”
“위험하잖아, 가야지.”
“쟤 지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약간 그 느낌이야, 너무 좋아서 벽 다 뿌시고 싶어! 하는 그거.”
“뭔 소리야 진짜?”

여상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하나도 안 위험한 것 같은데…. 쾅쾅 때려 부수는 소리 사이로, 강여상의 목소리가 조근조근. 뭐 마비 됐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위기의식이 없지? 자기가 만든 세계라 그런가?

“…야, 너 혹시 전부 때려 부수고 싶어?”
“…아니?”
“막, 모든 게 마음에 안들어?”
“…아니???”
“요즘 힘든 일 있어? 스트레스 받는 건?”
“없는데?”

근데 왜지??? 진짜 모르겠네. 정우영이 강여상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쓰는 도중에도 큰 도라지는 여기저기를 때려 부수고 있었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눈앞의 강여상은 그저 영 알쏭달쏭. 뒤에선 세상이 온통 무너져 가는데, 우영과 여상은 그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정우영은 이 모든 사태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5년 지기 친구는 세계를 쥐락펴락하다 못해 그냥 온 우주를 뒤엎을 수 있는 신이랜다. 믿고 의지하던 형들은 안드로이드랑 미래인이라고 하고. 맨날 저랑 누가 더 잘났네 못났네 아웅다웅 다투던 친구 놈 정체가 다름 아닌 초능력자. 무지개다리 건넌 줄만 알고 슬퍼했던 강아지는 내 친구가 되어 살고 있었고. 최종호나 송민기도 아직 못 물어봤지만 분명 뭔가 자기들 능력을 가지고 있겠지. 형들이 그랬으니까. 근데 나는 그냥 인간. 이게 뭐야? 솔직히 존나 맥이 빠지잖아. 어벤져스 사이에 낀 일반인. 날고 기는 롤 챔피언들 사이에서의 포로. 히어로영화의 엑스트라.

그러더니 이젠 아주, 우주가 내 손에 달렸다고.
일반인한테 우주의 운명을 맡기는 어벤져스가 어디 있어. 포로가 구해줘야 하는 챔피언들이 어디 있냐고. 엑스트라에게 빚지는 히어로가 말이 되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도, 인간이 된 강아지도, 초능력자도, 미래인도, 안드로이드도 못 구하는 우주를 내가 어떻게 구해. 네가 나를 선택했다고? 도대체 네 곁의 인간한테 뭘 바라는 거야, 이 엉뚱한 신아.

“야, 하나만 묻자.”
“뭔데?”
“넌 갑자기 내가 왜 생각났냐?”

여상이 다시 조개처럼 꾹 입을 닫았다. 딸꾹. 딸꾹? 딸꾹질할 때마다 맞춰 여상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뭐, 뭐야? 우영이 더 놀랐다.

“이거 진짜 꿈이지…?”
“확인을 몇 번이나 받는 거야? 꿈이면 어떡하고, 꿈 아니면 또 어쩌게?”

약간 상기된 얼굴로 여상이 대답을 망설였다. 수줍은 눈치였다. 꼭 취한 것처럼 구네. 잠에 취한 건가, 아님 폐쇄 공간이라 그런 건가. 사이에 뜬 정적에 민망해진 우영이 다시 성급히 입을 열어 붙인 농담 같은 질문을 덧붙였다.

“너, 나 보고 싶었구나?”
“…그냥, 눈 뜨니까 여기였는데…. 네가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더니, 네가 나타났어.”

배시시 웃는 얼굴이 수줍다. 여상은 여전히 딸꾹, 딸꾹. 반쯤 걸어낸 확신으로, 우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뭐가?”
“요즘은 또, 무슨 생각 했어? 여기는… 꿈이잖아. 뭐든 말해봐.”

알쏭달쏭한 그 머릿속을 열어나 보자. 힌트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쿵쿵 울려대는 땅도, 무언가 부수어지는 소리도, 강여상의 딸꾹질도 전부 애써 못 들은 체 하며 우영이 바싹 마른 입으로 다음 말꼬를 텄다. 네가 세상을 온통 재구성하려는 이유, 나는 지금 그게 궁금해. 조금 망설이던 여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것을 완전히 믿은 눈치였다.

“…네가 좋다는 생각.”

그리곤 또 딸꾹. 어? 우영이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니가 너무, 너무 좋다는 생각.”

나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그래서, 내가 좀 더 용기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

딸꾹.

“세상이 온통 뒤바뀌어서, 내가 엄청 용감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딸꾹.

“오늘은 꼭 말하고 싶었는데…….”

바닥에 주저앉은 여상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딸꾹, 딸꾹, 딸꾹.

그러니까 지금, 고작 날 좋아한다는 이유로 우주를 재구성하겠다고?
그제야 대화가 한참 뱅뱅 맴돌다 결국 당장 피시방 와 롤 하자, 로 끝나고 말았던, 저녁즈음 강여상의 모든 전화가 이해가 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 떡 벌린 우영이 우두커니 주저앉은 여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순간,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 우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보다 세 배는 커진 듯한 큰 도라지가 여상과 같은 포즈로 주저앉아 있었다. 딸꾹, 딸꾹, 딸꾹.
…저거 강여상이랑 동기화도 되는 거였어?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여상과 큰 도라지는 여전히 딸꾹, 딸꾹, 딸꾹.

“지금 말해봐.”
“뭐… 뭘?”
“오늘 말하려던 거.”

우영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꿈이잖아. 깨고 나면 너도, 나도 다 까먹을 거야.”

정우영이 사랑한 모든 것이 이 세계에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조금 지루한 전공수업. 동아리 방에서 때우는 공강 시간. 정오의 낮잠. 연습 끝난 후의 술자리. 성적은 좀 안 나왔어도, 스스로 만들어 낸 모든 작품들. 함께하는 식사. 함께 보는 영화. 함께 하는 게임. 그 모든 것들. 우연으로 만나 쌓아간 추억들. 형들 무릎 베고 누워 잔뜩 애교 부리던 날들. 친구들과 함께 게임하며 소리 높여 웃던 날들. 진지하게 최종호 연애 상담 들어주다 참지 못하고 쳐버린 장난에 등짝 맞던 순간들도. 정우영은 그 모든 것을 잃기 싫었다.

“…좋아해.”

제 앞에서 사랑 고백 하나 하지 못해 온 우주를 뒤엎어 버리려는 엉뚱한 신, 강여상까지도.

“그렇게 말하면 되지, 바보야.”
“나한테 이런 건…….”

너무 어려운 문제란 말야. 여전히 바닥에 푹 주저앉은 여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일으켜 세우려 손 내민 정우영만 민망했다. 야, 우냐? 분위기 환기시키겠다고 던진 농담에도 대답은 없고, 딸꾹. 딸꾹. 딸꾹.

“혹시라도 네가 싫다고 하면.”

사이의 침묵이 길었다.

“그럼, 진짜 친구도 못 하게 될까 봐 무섭단 말야.”

최초의 솔직함으로, 세상의 신이 입을 연다.

“나는 니가 정말 좋아서, 정말정말 좋아서….”

우영은 뻗은 손을 거둔다. 여전히 푹 고개 숙인 강여상 옆에 함께 주저앉는다. 딸꾹, 딸꾹, 딸꾹….

“…몰라…. 말 못 하겠어.”
“…우는 건 아니지?”

여상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고백 하나에 세상까지 바꿔야 돼?”

샐쭉해진 여상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내가 무슨 용기를 내야 하는지 너는 몰라.”

뭘 몰라…. 네가 지금 용기를 내기 위해 온 우주를 뒤엎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아주 잘 알겠는데. 말을 속으로 꾹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선 우영이 다시 여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그냥 말해.”
“…….”
“물론 넌 세상을 다 뒤바꿔야만 용기가 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이 세계는 수많은 평행세계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네가 이걸 다 바꾸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좋아. 형들도 좋고, 애들도 좋고, 너도 좋고.”

고개를 빼꼼 쳐든 여상이 우영의 손을 오래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이 평행우주가 우리가 만난 단 하나의 시간선일 수도 있잖아.”

여상 눈가의 출생점이 오늘따라 유독 붉다.

“그러니까 나는 이 우주를 아주 소중하게 여길래.”

네가 온 세상과 우주를 뒤엎고 그걸 다시 세울 힘이 있다고 해도, 우리 앞에 펼쳐진 평행우주가 수천수만 개라고 해도, 어쩌면 단 하나의 신에게 선택받은 단 하나의 인간으로 살 수 있다고 해도,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세계가 좋아. 너랑 만나게 된 것도 좋고.”

그러니까 일어나. 우영이 다시 손을 흔들어 재촉했다. 눈가가 붉게 어그러진 여상이 그제야 제 팔을 뻗어 우영의 손을 맞잡았다.

“…좋아해. 진짜 좋아해. 예전부터 그랬어.”

그러곤 와앙, 울음이었다.
그 애의 아주 커다란 무언가를 빵 터트려 버린 것 같았다. 울음주머니일지도, 혹은 저 혼자 꼭꼭 숨겨두었던 마음일지도 모르는. 한 손으로 여전히 우영의 손을 잡은 채, 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작고 둥글게 웅크린 여상의 등 위로 무언가 뿅 솟아났다. 헤헷몬이었다. 어디선가 와글와글 모여든 헤헷몬들이 여상의 옷자락에 매달려 바둥바둥, 여상의 어깨로 등반하고 있었다. …방해하지 마. 우영이 일일이 헤헷몬을 집어다 다시 아래로 돌려놓았다. 헤헷몬들은 조금 발 구르며 삐진 티를 내다가도, 여상의 발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신발을 쓰다듬거나 제 볼을 부벼왔다. 나름의 위로라도 하는 건가. 어느새 딸꾹질도, 울음도 그친 여상이 그 꼴을 빤히 내려다봤다.

“우와, 헤헷몬이다….”
“걔네가 너 울지 말래.”
“우영아, 너 헤헷몬이랑 대화도 할 수 있어?”

대화겠냐? 딱 봐도 몸짓이 그렇잖어. 크흥, 코 훌쩍거리며 여상이 제 오른손바닥을 내밀었다. 헤헷몬 하나가 여상의 손바닥 위로 올라섰다.

“내가 그렸던 거보다 예쁘게 생겼어.”

여상이 제 손바닥 위에 올라온 헤헷몬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 그림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우영만 만면에 물음표를 띄웠다. 헤헷몬과 볼 한 번 부빈 여상이, 헤헷몬을 다시 바닥에 돌려놓은 다음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전히 우영과 한쪽 손을 꼭 마주 잡은 채였다.

“내가 꿈에서 깨도 말할 수 있을까?”
“해, 저질러봐.”

우주를 뒤엎는 것보다도 고백이 어렵다니. 우영으로서는 영 알기 힘든 감정이다.

“…자신이 없어.”

말꼬리를 잔뜩 흐린 여상이 제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그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우영이 제 턱을 긁었다. 나를 좋아한댔지. 그렇다면야, 이 정도는….

“괜찮아.”

우영이 손에 힘을 주어 여상을 끌어당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어.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

갑자기 훅 좁혀진 거리감에, 여상이 우영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내일 꼭 다시 말해줘. 좋아한다고.”

두 눈 꾹 감은 우영이 여상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두 입술이 맞붙었다. 우영으로서도 큰 용기다. 네가 보여준 용기의 보답을 보여줄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어쩌면 우리가 연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드라마에서는 이렇게 시작되는 사랑도 많던데.

강여상이 차마 눈도 못 감고 첫 키스를 하는 동안, 둘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큰 도라지가 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아주아주 커다란 초코퐁듀 속으로 퐁당, 손잡고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4 - 목요일의 도넛은 먼 길을 떠난다. - 2

삐빅, 삐빅, 삐빅, 삐빅…. 더듬더듬 손 뻗어 제 핸드폰을 찾아낸 우영이 알람을 10분 뒤로 미뤘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알람이 원래 이렇게 시끄러웠나? 너무 오랜만에 듣는…. 아, 잠깐만.
벼락같이 몸을 일으켜 세운 우영이 핸드폰을 다시 집어들었다.

“우와, 목요일이다….”

드디어, 목요일이 도래해 있었다.







눈 뜨자마자 우영은 제일 먼저 홍중과 성화를 찾았다. 머리 들이밀고 잔뜩 애교부려 가며 나 잘해찌, 얼른 칭찬해죠. 머리 쓰다듬어. 반강요를 했다. 평소라면 아우 쫌, 하고 귀찮은 티를 냈을 김홍중도 이날만큼은 정우영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건 일종의 전우애였다. 아주아주 긴 하루를 무사히 헤쳐나온 동지들. 셋이 함께 밥을 먹었다. 마지막을 기념하는 의미로 중식은 어때, 권하다 기어이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다. 대낮부터 수업 하나 제끼고 삼겹살집에서 맥주를 깠다. 형들 진짜 고생 많았어. 하는 건배사에 성화는 조금 쑥스러워했다. 기억도 못 하는 나보다는 다 기억하는 너희가 훨씬 고생했지. 우영은 넉살 좋게, 그런 말 말라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근데 있잖아, 우영이는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거야?”

성화의 질문에 우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기는 그런 문제의 답은 모른다는 것처럼.

“글쎄, 나는 너무 잘 알 것 같은데.”

뭔데? 성화가 되물었지만 홍중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뭐야, 나만 몰라.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성화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둘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쨌든, 여상이 덕분에 이 지구는 조금의 질량비도 어긋나지 않은 상태로, 아주 조화롭게 움직이고 있어. 오늘도.”

김홍중의 건배사에 쨍, 공중에서 세 잔의 유리잔이 부딪혔다. 아, 아무것도 모르는 이 우주의 신, 강여상은 뭐 하고 있으려나. 우영이 제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메세지라도 하나 보내볼까.
그때, 우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상 [우영아, 바빠?]

메세지를 확인 한 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쥐고 있던 집게를 성화에게 억지로 쥐여주었다.

“형들끼리 먹어, 나 급한 일 있어서 간다!”

달려나가며 우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신호음에 맞추어 심장이 뛰었다.

우주를 다 뒤엎고 싶을 만큼 벅찬 마음을 가지고도, 꿈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었던 고백의 무게를 우영이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를 사랑하는 강여상.
그건 그 어떤 신보다도 특별한 사람이었다.








-
스즈미야하루히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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